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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신은 편재한다. 편재(Ubiquitous: 유비쿼터스)란 널리 퍼져 있음(어디에나 있음)을 의미한다. 절대자의 편재성은 다양한 종교 체계에서 서로 다르게 인식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일신론에서는 신과 우주가 별개의 존재이나 신은 편재한다고 믿으며 범신론에서는 우주가 곧 신이라고 믿는다. 내재신론에서는 신이 우주에 관입하지만, 시공간 그 너머까지 연장되어 있다고 본다. ※관입(貫入): 꿰뚫어 들어감. 유비쿼터스(Ubiquitous) 컴퓨팅이란 언제 어디서든 어떤 기기를 통해서도 컴퓨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넷(연결)은 편재(Ubiquitous)한다. 영어 유비쿼터스(Ubiquitous)는 라틴어 omnipræséntĭa(옴니프라이센티아, 옴니프레센티아)를 어원으로 하며 이는 하느님(..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욕망하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하는 것을 얻은 후 그것을 재차 얻게 된다면 느끼는 행복은 처음과 같지 않다. 욕망이 처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며 행복이란 욕망이다. 욕망이란 고통의 상태에서 그 고통의 해소되길 바라는 것이며 욕망은 고통에 의해 생겨난다. 우리는 건강을 잃으면 건강을 갈망한다. 그 이유는 건강하지 않음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건강한 상태에서는 고통이 없고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고통이 있기에 건강할 때는 건강함을 바라지 않지만 건강하지 않을 때는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여 건강을 갈망하게 된다. 행복이란 고통의 해소이다. ※행복=고통의 해소(소멸)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과 양념은 허기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

여우와 신포도

어느 여우가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린 것을 보고 포도를 따 먹으려고 하였는데, 포도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먹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우는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먹지 아니한 것으로, 그 이유를 포도가 달콤한 포도가 아닌, 신 포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신 포도란 '욕망하지만,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욕망하지 않는 척을 하는 대상'을 말한다.

목록/부록 2024.03.15

우주는 헛되며 신은 열등하다.

신이 빛이 있으라 하니, 칠흑 속에서 빛과 어둠이 나왔다. 빛이 있기 전에는 칠흑만이 있었다. 칠흑은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이다. 빛의 부재는 어둠이요, 어둠의 부재는 빛이다. 빛은 어둠 없이 있을 수 없고 어둠은 빛없이 있을 수 없다. 빛의 시작은 어둠의 시작이며 어둠의 시작은 빛이 시작이다. 빛과 어둠의 총합은 칠흑이다. 칠흑은 칠흑임과 동시에 빛과 어둠이며 빛과 어둠은 항상 같이 다니며 같이 사라진다. 신은 칠흑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인간은 그러한 신을 본따 만들었으며 신보다 뛰어남과 동시에 열등하다. 인간은 빛을 더 빛나게 할 수 있음에 신보다 뛰어나며 인간은 어둠을 더 어둡게 할 수 있음에 신보다 열등하다. 신의 우주는 칠흑에서 나왔으나 인간의 우주는 인간에게서 나왔다. 인간이 신을..

세상이 너무 싫다면, 차라리 죽어라.

User인간은 집단에 해가 될 수 있는 인간을 집단에서 제거하려는 본성이 있다. 집단에 해가 될 수 있는 인간은 괴롭힘의 대상이 되며, 집단 구성원들은 그 인간이 스스로 죽어주길 바란다. 약간 정의로운 사람은 그 인간이 괴롭힘을 못버티고 끝내는 다른 집단으로 스스로 가주길 바랄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존율은 올라갔다. 조금 정의로운 사람은 그 인간이 스스로 죽어주길 바란다. 그 인간이 죽지 않고 다른 집단으로 옮겨갈 뿐이라면, 이는 폭탄 돌리기와 같기 때문이다. 많이 정의로운 사람은 그 인간을 처단한다. 정의로운 인간은 예수가 십자기를 메듯, 죄의 책임을 메고 악을 제거한다. 그리고 가장 악한 인간은 괴롭힘의 대상이 된 그 인간이다. 괴롭힘을 받아 가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인간은 집단에서 ..

홀로 태어나 하나로 완성된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밖에 없다. 무엇도 필요 없으나 상상력은 있어야 한다. 상상력은 정체성이요, 존재 이유이며 길잡이다. 길은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다른 길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이다. 길의 끝이 절벽이라도 가야 하는 이유이며 홀로 걷는 고독한 여정이라도 가야 하는 이유이다. 고통은 나약함의 필연이며 영원하다. 나약함 속에서도 강직함을, 흔들림 속에서도 경건함을 가져야 한다. 길은 언제나 갈라지며 점으로 모인다. 시작도 점이었으며 길은 점 위에 있다. 길의 마지막에 다다른 곳도 점이다. 길은 점 위에 있지만 점은 길 위에 없다. 길은 점의 점철이며 길은 점 그 자체이다. 점은 또한 길이다. 길은 나 자체이기에 다른 길에서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지나온 길은 생이며 지나갈 길은..

토끼는 사자를 욕하고 주접을 떤다.

인간은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면 상대의 인성을 욕한다. 그렇다고 상대의 인성을 욕하는 인간의 인성이 상대보다 나은 인간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 인성을 욕하는 인간이 더 못났다. 단지, 상대보다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그 못난 인성을 상대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상대의 인성을 욕할 뿐이다. 인성이 좋은 인간이란 덕이 높은 자이지 힘이 약한 자가 아니다. 인성이 좋은 인간은 남의 인성을 욕하는 하고 평가하는 인간이 아니다. 인성이 좋은 인간은 인성 나쁜 인간들의 선구자다. 토끼가 생각하는 사이에, 사자가 토끼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토끼가 해야 할 일은 사자로부터 도망가는 것이지, 덕을 쌓는 일이 아니다. 생각하는 일 또한 토끼가 할 일이 아니다. 토끼가 철학을 한다고 주접을 떠는 사이, 사자는 토끼를 먹으려고..

인간은 이야기이고 삶은 의미이다.

우리는 타인 또는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의 이야기가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떠한 일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다르다. 삶의 의미 또한 하나의 연극에서 어떤 역할인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를 답하려면 역할과 이야기 그리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 말해봐야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경험을 하였고 어떤 이야기를 가졌는지로 우리는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이해한다.

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지구의 중심은 어디이며 중력이란 어디에 있는 것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가? 세계지도를 만든다면, 굳이 자신의 나라를 지도 변방에 넣어서 만드는 경우는 없을 것이며 그 세계지도의 중심은 그 지도를 제작한 국가가 될 것이다. 각 국가가 자신의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지도를 만들며 그것은 자연스럽다. 세계지도의 중심은 모든 국가이며 또한 아니다. 지구의 중심은 모든 곳이며 또한 아니다. 지구가 존재하는 것을 보니 중력이 존재한다. 지구를 나누니 바위가, 바위를 나누니 모래가, 모래를 나누니 원자가, 원자를 나누니 쿼크가 나왔다. 중력은 보이지 않는다. 물질을 전부 나누어 보니 인력과 척력만이 존재할 뿐, 중력은 보이지 않는다. 인력과 척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머리를 갈라보니 뉴런이 보인다. 뉴런을 관찰하니 서로 ..

자본주의는 악한가?

돈을 욕망하는 것은 악한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의사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서 들인 노력과 시간이라는 재화는 무엇으로 보상해 주어야 하는가? 선한 의도와 목적성을 가진 의사가 병원을 운영한다. 이 의사는 너무 선해서 돈보다 항상 환자의 생명을 우선시하였다. 그 결과 10명의 환자를 살렸으나 병원 건물 월세와 직원들의 인건비를 내지 못하였고 빚더미에 앉았다. 이혼을 당하고 삶은 파괴되고 노력과 시간을 보상받지도 못하였다. 병원은 아주 짧은 순간 존재하였고 일자리는 사라졌다. 한 개인으로서도 불행하고 실패하였다. 선한 의도와 목적성만 가진 것은 작은 사랑이라고 한다. 큰 사랑이란, 환자의 생명을 우선시하고 또한 합당한 돈을 받는 것이다. 그 돈으로 병원 건물의 월세 내고 병원 직원들의 인건비도 주고 자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