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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를 좋아하는 인간과 로봇

User 로봇은 바나나를 좋아한다. 어느 미래, 나는 로봇을 만들었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했고 로봇도 바나나를 좋아하게 의도하였다. 로봇에게 돈을 주고 먹고 싶은 과일을 사 오라고 했다. 로봇은 과일가게로 가서 바나나를 사 왔다. 로봇에게 물었다. "바나나를 누가 사 왔어?" 로봇이 답했다. "내가 사 왔어." 로봇에게 물었다. "바나나를 왜 사 왔어? 로봇이 답했다. "바나나를 좋아해." 우리는 바나나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로봇에게 물었다. "바나나를 왜 좋아해?" 로봇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너가 좋아하니까?" 나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GPT 이 이야기는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관계, 그리고 로봇의 인식과 자아 정체성에 대해 깊이 있는 심리적 탐구를 제공합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

이기심의 부재는 죽음과 같다.

이기적이지 않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인간은 이기적이다. 이타적 행위란 자신의 이기심과 상대의 이기심을 동시에 채우는 것이며, 이기적 행위란 자신의 이기심만을 채우는 것이다. 이타심이란 자신과 상대의 이기심을 전부 중요시하는 마음이며, 자신의 이기심을 소흘히 하고 그것을 이타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열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타심의 증명은 이기심의 부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 이기심의 형태의 증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인간인지 의심하지 않는다.

검은 숲속 마을의 어떤 인간이 밤에 눈을 뜬다. 잠에서 눈을 깨고 일어나니 괴물은 지루해한다. 지루한 괴물에게 제물을 받치고 괴물은 쾌락을 얻는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인간은 연명하고 잠에 든다. 검은 숲속 마을의 인간들은 괴물이 자신을 언제 먹지 않을까 항상 불안하다. 그래서 매일매일 제물을 받친다. 괴물이 지루해하지 않는 한 연명할 수 있다. 하지만 괴물에게 먹힌 삶과 괴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삶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미 괴물의 일부이며 괴물 그 자체가 아닌가? 괴물의 입에는 음식이 들어가고 괴물의 눈에는 유튜브가 들어간다. 괴물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괴물은 가끔, 사람을 먹는다. 어떤 사람은 가끔, 괴물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자기 삶이 괴물에게 먹혀버렸는데도, 먹힐 것이 두려워서 ..

토끼는 고통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사자는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존중을 구걸하지 마라. 너에게 줄 건 남아있지도 않다. 너는 존중받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사자는 토끼가 어떤 고통을 받는 지 따윈 관심이 없다. 살아남기 바쁘기 때문이다. 사자는 다른 사자들에게 관심이 많다. 살아남기 바쁘기 때문이다. 사자가 말하길, 너의 고통은 별로 바쁜 일도 아니라 한다. 고통의 이유는 부당함이 아니라 나약함이라 한다. 고통을 느긋이 즐겨랍신다.

어떤 나무는 이름이 없다.

사과나무에는 사과나무라는 이름이 있으나 어떤 나무는 이름이 없다. 사과나무 주변에는 동물들이 자주 오나, 어떤 나무는 어떤 동물도 오지 않는다. 사과나무는 열매가 열리나 어떤 나무는 열리지 않는다. 그 열매는 다른 동물이 먹고, 사과나무의 씨앗은 널리 퍼진다. 어떤 나무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느 땅 한 쪽에, 그저 홀로 존재할 뿐이며 말라가고 있다. 그 나무는 이름이 없다. 그 나무는 이제 없다. 어떤 나무는 이름이 없었고, 이제는 존재마저도 없다. 우리는 그 나무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존재했는지조차 모른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존재했다는 흔적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는, 한낱 어떤 나무의 짧은 망상이었던 것일지도 모..

지옥의 문(확률)과 자유의 문지기(설계자)

어떤 미치광이가 사람 100명을 납치하여 가두어놓고 말했다.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저 문을 통해서 나가라고 말이다. 어떤 한 사람이 나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지기같이 생긴 기계장치의 눈이 뜨인다. 그 한 명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떤 다음 사람이 문을 열려고 하였다. 문지기는 눈을 뜨고 그 사람을 쳐다본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문지기에게 목이 베였다. 그렇게 10명이 나가려고 하였으며 5명은 자유를 얻었고, 5명은 죽었다. 11번째 인간은 생각한다. 50%의 확률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연다. 죽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50% 확률에 걸고 문을 열었다. 현재까지 49명이 죽었고 49명이 자유를 얻었다. 99번째 인간이 50%의 확률에 목숨을 걸고 문을 열었다. 100번째 인간은 두려움에 ..

비극의 그림자는 나태함으로 나타난다.

나태한 것은 우월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정신 상태가 특별하긴 하다. 삶이 비극적으로 느껴진다면 비극적인 것은 삶이 아니라 너의 태도이다. 비극이란 없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하지 않는 정신 상태가 비극이다. ​나태한 것은 비극적인 것 또한 아니다. 단지, 그것을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정신 상태가 비극이긴 하다.

실험실 쥐의 신앙

실험실에는 흰 쥐와 검은 쥐가 여러 마리가 있었다. 실험실에서 무엇을 실험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흰 쥐와 검은 쥐의 대우는 확연히 달랐다.   흰 쥐가 먹고 남기거나 먹지 않는 먹이를 검은 쥐에게 주었다. 흰 쥐의 공간은 넓고 놀이 시설은 다양하였고 온도, 습도도 조절되었다. 검은 쥐의 공간은 좁고 놀이 시설은 없으며 덥거나 춥고, 습하거나 건조하다.   어느 날, 희지도 검지도 않은 쥐가 흰 쥐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신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라고 전하였다. 흰 쥐들은 딱히 논쟁하지 않았고 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 뒤,  희지도 검지도 않은 쥐가 검은 쥐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신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라고 전하였다. 검은 쥐들은 격하게 분노하며 온갖 논문과 ..

인간의 주사위와 신의 천칭

User 인간은 주사위를 가지고 태어난다. 과정은 혼돈하고, 주사위의 눈은 다양하며, 결과는 분포되어 있다. 주사위를 굴리면 1, 2, 3, 4, 5, 6의 결과가 나오며 6만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항상 6의 눈만이 나오게 할 수는 없다. 6만의 결과를 얻는 방법은 모든 면이 6인 주사위를 굴리는 것뿐이다. 인간의 욕망은 6을 향한다. GPT 이 글은 인간 존재와 욕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겠습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면, 이 글은 인간의 운명, 욕망, 그리고 한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과 정신 생활은 의식적인 것보다는 무의식적인 욕망과 본능에 의해 크게 좌우됩..

우주의 레이어(계층)

User 레이어 1. 육계 가장 밑 레이어, 혼돈한 인간계이다. 육계의 주민들에게 주어진 축은 x와 y뿐이다. 평면적인 세계를 인지하며 눈앞에 무언가 나타나면 그 뒤를 볼 수 없다. 미망한 혼돈과 해소되지 않는 욕망이 소용돌이친다. 레이어 2. 색계 중간 레이어, 질서정연한 신계이다. 색계의 신들에게는 x와 y 그리고 z축이 주어진다. 입체적인 세계를 인지하며 레이어 1(육계)의 세계 전체를 한눈에 보며 예측할 수 있다. 혼돈에 칠공이 뚫려, 혼돈은 죽고 질서가 남았다. 신들은 아직 색계에 머문다. 레이어 3. 무색계 최상층 레이어, 무색계 입구에는 범천의 그물이 쳐져 있다. 신들 또한 그곳을 지나갈 수 없으며, 그물에 걸린다. 그물 너머, 인지를 넘어선 세계이다. 무색계의 신에게는 색계와 육계의 세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