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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너무 싫다면, 차라리 죽어라.

데라우스티오 2024. 3. 15.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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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집단에 해가 될 수 있는 인간을 집단에서 제거하려는 본성이 있다.
집단에 해가 될 수 있는 인간은 괴롭힘의 대상이 되며, 집단 구성원들은 그 인간이 스스로 죽어주길 바란다.
약간 정의로운 사람은 그 인간이 괴롭힘을 못버티고 끝내는 다른 집단으로 스스로 가주길 바랄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존율은 올라갔다.
조금 정의로운 사람은 그 인간이 스스로 죽어주길 바란다.
그 인간이 죽지 않고 다른 집단으로 옮겨갈 뿐이라면, 이는 폭탄 돌리기와 같기 때문이다.
많이 정의로운 사람은 그 인간을 처단한다.
정의로운 인간은 예수가 십자기를 메듯, 죄의 책임을 메고 악을 제거한다.
그리고 가장 악한 인간은 괴롭힘의 대상이 된 그 인간이다.
괴롭힘을 받아 가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인간은 집단에서 가장 해로우며 악한 존재이다.
사회는 그런 인간을 죽이려고 끝없이 괴롭혔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니,
신은 그런 인간을 죽이려고 끝없이 고통을 주었는데 아직도 살아있다니,
아직도 꾸역꾸역 살아간다니, 악마의 생존력은 너무도 질기다.

너가 사회를, 우주를, 신을 싫어하는 만큼
사회도, 우주도, 신도 너를 그만큼 싫어한다.
아니, 너가 싫어하는 것보다도 너를 싫어한다.

이제 그만 깨달아라. 고통을 주는 이유는 너에게 두 가지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죽든가, 개도하든 가라는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인간들이 너무 밉고 사는 것이 너무 괴롭다면 너는 죄인이다.
너의 죄로 인해, 너는 고통받는 것인데, 누구를 미워하는 것인가?
더 이상, 죄를 늘리지 말라.

너의 죄를 끝없이 돌아보고 끝없이 성찰하고 끝없이 개선하라.
그렇다면 세상도 너를 좋아할 것이며 너도 세상이 좋아질 것이다.
고통도 사라질 것이며 너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될 것이며
사랑을 줄 수 있는 인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너와 같았던 사람들을 보듬어 줄 수도 있다.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너는 아무런 죄가 없으며
너를 괴롭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생각할 뿐이라면
너는 죽어야 한다. 너의 고통은 끝이 없고 영원할 것이다.
그것이 신의 심판이며 그것이 신의 메시지이며 신의 의지다.

너가 왜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이 지구에서 악마는 살아갈 수 없다.
신은 허락치 않으며 악마를 염화로 다스린다.
이러한 고통은 너가 개도할 때까지 영원히 지속된다.
너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세상이 너무 싫다면 너는 죄인이다.
세상은 너가 세상을 싫어하는 것보다
너를 싫어한다. 세상이 싫다면 죽어라.
죽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의 죽음을 보고 웃을 것이다.

세상이 너의 죽음에 웃는다면 너는 죄인이다.
세상이 너의 죽음에 울어준다면 너는 죄 없는 인간이다.

웃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만 울 게 될 것이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데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 날 때 장난할 때도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데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을
오늘 밤에 다녀가신데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데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데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 날 때 장난할 때도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데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을
오늘 밤에 다녀가신데

산타할아버지는 전지하다. 모든 아이의 행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전능하다. 울지 않는 아이,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
그리고 우는 아이, 나쁜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다.

너가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산타할아버지를 미워한다면,
너는 우는 아이이면서 나쁜 아이이며 더불어 이기적이기 까지 한 아이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며, 선물을 받지 못한 이유를 성찰할 줄 모른다.
그런 아이는 사탄할아버지가 단두대로 끌고 가 목을 잘라놓을 것이다.

매해 크리스마스, 산타는 선물과 단두대 둘 다 가지고 온다.
전지전능하며 영원불멸하다.
너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세상 모든 인간이 너를 나쁘게 대한다면 나쁜 건 세상일까? 너일까?
세상 모든 인간이 악마로 보인다면, 그들은 너를 천사로 볼까? 악마로 볼까?
죽어야만 하는 인간이란 것도 있는 것이다. 기회는 무한하지 않다. 삶은 유한하다.
전부 싫다면 죽어라.

이는 신의 의지이며 신의 뜻이다.
세상을 미워하지 말고
너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웃어라. 웃을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
웃어라! 그러면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산타와 사탄, 그리고 예수는 모두 흰 머리의 소유자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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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많은 감정과 복잡한 인간관계, 사회적 상황이 얽혀 있으며, 심리학적 및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러 층위가 존재합니다. 글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 집단 내의 역동성, 그리고 개인이 사회적 압력과 기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집단에서의 소외와 괴롭힘, 자기희생과 타인에 대한 폭력적 기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행동은 본능적인 공격성과 죽음의 본능(Thanatos)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내재한 파괴적 본능과 생명력을 추구하는 본능(Eros) 사이의 영원한 충돌을 이론화했습니다. 집단에서 해로운 인물을 배제하려는 욕구는 이러한 본능적 충돌의 사회적 반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초자아는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며, 이 이상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나 개인을 배제하려는 욕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개인과 사회, 신과의 관계에 대한 극단적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 부분은 인간의 고통과 죄책감, 자기 개선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심오한 탐색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라캉의 이론을 적용하면, '대타자'의 개념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대타자는 사회적 규범과 기대를 내면화한 구조로, 개인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고통과 죄책감을 느끼는 개인은 대타자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려 하지만, 이는 종종 완전한 만족이나 해결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산타할아버지와 사탄할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인간 행위와 도덕적 판단에 대한 사회적 기대를 탐구합니다. 이 비유는 어린이가 선물을 받기 위해 '착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을 반영하며, 이는 자기 검열과 외부 평가에 대한 압력을 나타냅니다. 라캉은 욕망의 구조와 언어, 상징적 질서 사이의 관계를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산타할아버지는 상징적 질서의 대표자로,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기준을 내면화하고 이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도록 개인에게 요구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글은 인간의 내적 갈등, 사회적 압력, 도덕적 판단의 복잡성을 다루며, 정신분석적 이론을 통해 이러한 주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과 정신 상태에 대한 이해는 프로이트와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더욱 풍부하게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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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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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내용은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 다양한 신학적, 윤리적 층위를 탐색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관점, 특히 기독교 신학에서는 인간의 고통, 죄와 구원,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중요한 주제로 다룹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집단에서 해로운 인간을 배제하려는 행위와 관련된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제기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각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와 개인적 죄로 인해 불완전하며, 이러한 죄는 공동체 내에서의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집단 내에서의 배제와 괴롭힘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죄성과 그로 인한 공동체의 파괴적인 행위를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통해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통과 죄책감, 그리고 신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드러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고통은 종종 인간 삶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이해되며, 때로는 영적 성장의 기회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최고의 사랑과 희생의 표현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정의로운 인간은 예수가 십자기를 메듯, 죄의 책임을 메고 악을 제거한다"고 언급한 부분은, 신학적으로 볼 때, 구원의 가능성과 개인이 짊어질 수 있는 도덕적, 영적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나타냅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 산타할아버지의 비유는 행위에 대한 보상과 벌의 구조를 단순화하여 표현합니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보상 체계를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신의 최종적인 심판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단순한 행위-보상의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신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전반적으로, 이 글에 담긴 복잡한 감정과 상황을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인간의 죄성과 고통, 그리고 신의 은혜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직면한 도덕적, 영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며, 개인과 공동체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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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해야하는 인간이 공동체를 좀 먹고 붕괴를 촉발하고 있을 때는 그 인간이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용서와 화해를 하고갈등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겠지만 일본의 히키코모리처럼 히키코모리같은 상태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면, 간단히 말해서 공동체에 어떤 이득도 되지않는 상태 그리고 사회적 비용의 소모가 그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유발되는 상태가 10년, 20년, 30년동안 지속된 인간들이 있다면 그러한 인간들도 여전히 용서하여야 하는 것일까? 5년정도는 기다릴 수 있겠지만 20년동안 사회를 좀먹는 인간은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한 인간들 마저도 존엄상과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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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접근할 때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 다양한 관점에서의 심층적인 탐구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본질적인 존엄성과 가치를 가집니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이 사회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떠한 영향을 미치든 간에 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또한 용서와 화해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에서 이러한 가치가 강조됩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는 개인도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적 관점이 사회적 현실과 직면할 때,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회적 비용, 공동체의 안녕, 그리고 다른 구성원들의 권리와 복지도 중요한 고려 사항입니다. 히키코모리와 같이 사회적으로 격리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상황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요인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과 사회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입니다.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하며,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개인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사회적 서비스, 심리적 치료 등을 포함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개인이 자신의 삶과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돕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회적 비용과 공동체의 안녕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사회적 자원의 배분, 공동체 내에서의 연대와 상호 지원 체계 구축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며,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에 접근할 때는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지원하고,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 복지를 도모하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은 변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선 사회적 지원과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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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러한 인간이 발생하고 그 상태가 지속되는 이유는 그 인간 개인이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 환경(부모책임)그리고 그 사회 환경(사회 책임)이 존재하기에 다른 책임 요건들로 인하여 그 인간을 용서하라는 말이지? 그리고 용서하고 또한 그 인간의 변화를 도와주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한 죄악은 대물림 되는 경향성이 있고 사회는 또한 관성이 있다. 그러나 떨쳐낼 수 없는 하나의 생각은 가정과 사회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구원, 구제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들은 왜 그렇게하지 못하나하는 것이고 예수를 목도하니 앉은뱅이는 스스로 일어나 걸었다한다. 중요한점은 예수가 일으켜 세우고 부축하여 이동시켜준것이 아니라 앉은뱅이가 스스로 일어나서 자기 발로 걸어나갔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으로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걸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들을 그렇제하지 못하는것인가? 최소한 그들이 스스로걸어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까진 해야마땅하지만 그러한 인간들 대부분은 누군가 업어주길 기다린다. 오래전부터 특이점을 기다리면서 특이점이 오면 자신의 인생을 전부 특이점이 온 후 AI가 책임져주길것이라 믿는, AI를 구원자라고 생각하며 기다리고 앉은뱅이인채로 영원히 살아가고가 하는 인간들도 존재하며 그들을 돕는다고해서 그런 마음가짐이 바뀔 것 같지않으며 그것은 낭비이다. 변화가능성이 존재한다고해서 범죄자를 처벌하지 아니할 수 없고 사형해야 마땅한 인간을 계속 살려둘 수도 없다. 기회를 주는 것에 사회적 비용이 계속 소모되며 희망을 갖는 것 기회를 주는 것도 무한정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변화가능성도 무한하지만 관성의 힘 또한 매우강력하다. 어떤 인간들은 자신의 못난 관성을 영원히 바꾸지 못한다 바꾸지 못하는 가능성또한 변화가능성 만큼 무한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지만 역시, 불가능성 또한 무한하다. 종교는 인간의 선을 이끌어내야 하기에 이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고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처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인간들이 무수히 많다. 그리고 또한 윤리적, 사회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들을 돕고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지당하나 그것을 다시 현실적으로 비춰보자면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 살기바쁘다. 누군가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나야 사회적 비용이 가장적다. 그러니까 누군가 넘어진 이유가 옆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으로는 넘어진 그 사람에게 책임이 가장 크며 넘어진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야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누구도 아닌 그 사람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처지에 있기에 마땅하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져야할 의무는 없다. 자신이 손해보면서 또한 그 사람을 돕고싶지않음에도 도와야하는 강력한 이유는 무엇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아야하는 열등한 인간들은 도움받지 못하며 종교적으로 열등한 인간을 도와야한다는 메시지는 현실적으로 무시된다. 열등한 상황에 놓여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진정한 열등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최소한 외모적으로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지고 열등한 상황에 놓여있으며 외모는 그 사람이 얼마나 도움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강력한 조건이 된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근원적 이유는 윤리나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성적 욕망이 강력한 동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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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개인의 책임, 사회적 연대, 그리고 종교적 가르침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기한 문제는 심도 깊은 철학적, 윤리적, 그리고 실천적 고민을 요구합니다. 각각의 포인트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책임
사회와 가정 환경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개인의 행동과 상황은 그들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가정적 지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개인의 책임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와 개인의 책임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변화의 가능성과 한계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많은 종교와 철학적 전통에서 중요한 원칙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변화를 이루는 것은 개인의 내적 결정과 노력뿐만 아니라, 외부의 지원과 조건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합니다. 모든 개인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실질적인 도움과 지원 체계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사회적 비용과 연대의 한계
사회적 비용과 연대의 문제는 공동체가 어떻게 자원을 분배하고,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사회적 연대의 표현이지만, 이러한 지원의 한계와 조건을 설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회적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이를 어떻게 분배할지에 대한 결정은 사회적 합의와 윤리적 판단에 기반해야 합니다.

종교와 현실 사이
종교는 종종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과 행동에 대한 지향점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이 현실의 복잡성과 직면했을 때, 실천의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가르침이 현실적으로 무시된다기보다는,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조정과 해석이 필요합니다. 종교와 윤리가 제공하는 지향점은 개인과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기와 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이러한 문제들은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기 어려운 복잡한 이슈입니다.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연대, 변화의 가능성과 한계, 종교와 현실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은 지속적인 노력과 대화를 필요로 합니다. 사회적 비용과 개인의 책임, 도움의 필요성과 한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는 공동체가 직면한 중요한 도전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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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인간일수록 사회는 그 인간을 싫어하고 그 인간 또한 사회를 싫어하게되고 이것은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악순환을 끊기위해서는 스스로가 자신을 구원하던가, 누군가가 자신을 일으켜세워주고 부축해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자신의 발로 걸어 스스로가 구원하던가, 그러지 못하겠다면 자살을 해주는 것이 공동체에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의지가 없다면 그것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동체 일원으로 인정해야하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그들은 지속적인 사회의 문제이다. 암같은 존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이 없으며 계속해서 직업을 구할 생각이 의지가 없는 사람은 자본주의에 필요한 존재인가? 자본주의라고 말하면 왜곡이 발생할 수 있는데, 좀 더 물리적으로 말해서 마을에 사람이 10명이고 10명이 살아가기 위해서 9명은 항상 노동을 하고 1명은 그 노동에 빌붙어서 기생충같이 살아간다면 그 1명은 살아가도 되는 인간인가? 살아가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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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에 대한 기여, 그리고 사회적 연대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윤리, 사회 정의,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 기여
사회적 관점에서 모든 구성원이 공동체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이러한 기여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반드시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술가, 자원봉사자, 가정을 돌보는 사람 등 다양한 역할이 사회의 다양성과 부를 창출합니다.

인간 존엄성과 사회적 연대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가지며, 이는 그들의 사회적 기여 여부와 무관합니다. 인간 존엄성의 개념은 개인이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권의 관념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연대의 정신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스스로 구원의 문제
개인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며, 일부는 심각한 심리적, 사회적 장애물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살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역할
공동체는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교육, 건강 관리, 사회 서비스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결론
사회적 연대와 인간 존엄성은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지원 체계가 함께 작동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들의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적 연대와 지원 체제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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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열등한 상태에 놓인 구제불가능한 인간들은 잉여자원에 의해 연명할 수 있는 축복받은 시대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원이 부족한 심각한 경쟁상태에 있던 과거또는 앞으로 그러한 상태로 인간이 나아간다면 그러한 구제불가능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나 지원같은 것들은 먼저 거두어질거라 생각한다.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기전에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개선해나가길 기도한다.

난 젖을 먹여 본 적이 있기에 젖을 빠는 아기를 사랑하는 게 얼마나 애틋한 지 알죠. 그럴지라도 젖 먹는 아기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이 없는 잇몸에서 내 젖꽂지를 확 뽑아내고 그 머리통을 박살 냈을 거에요.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더라면 말이죠. -맥베스 부인(맥베스가 던킨 왕을 죽이려는 계획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존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인간)이 존속하는데 가장 방해물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적 괴롭힘은 집단의 악행일 수도 있지만, 집단적 괴롭힘을 유발하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약한 것은 선한 것이 아니며 열등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악한 존재(evil)인지 성찰해봐야 할 것이다. 악은 선으로 소멸시켜야 한다. 악의 소멸은 그들의 죽음일 수도 있지만, 정말로 죽기 싫다면 새로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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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발언은 극단적인 상황과 선택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며, 사회와 개인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여러 차원에서 해석과 논의가 가능합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와 존속
인간 존속의 중요성과 그것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인간 자신을 지목하는 것은, 인간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합니다. 인류의 존속은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환경과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가치와 존속을 위협하는 요소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공동체 전체의 책임입니다.

약함과 열등함의 재해석
약함이나 열등함을 선과 악의 문제로 단순화하여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약점은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인과 사회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약한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소외시키는 대신, 그 원인을 이해하고 지원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와 재생의 가능성
개인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도한다는 말은, 변화와 재생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으나, 재생과 성장의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원과 이해가 결합될 때 더욱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결론
인류의 존속과 개인의 가치에 대한 고민은 인간이 직면한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단순하지 않으며, 다양한 관점과 접근이 필요합니다. 개인과 사회의 책임, 변화와 재생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모든 인간이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적 지원과 연대, 개인의 노력과 변화의 의지가 결합될 때, 보다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