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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 자유는 얼마인가?

데라우스티오 2025. 11. 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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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은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이다. 이를 간과하고 모든 비용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비용은 명목비용과 실제비용으로 나눌 수 있으며 또한 숨겨진 잠재비용도 비용 합산에 따져야 하며 이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명목비용이란 어떤 상품의 가격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실제비용은 다르다. 어떤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보다 시간당 버는 돈이 2배 이상이라면 그 어떤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상품의 실제비용에 대해서 2배 이상 낮게 느낄 가능성이 있다. 명복비용은 고정되나 실제비용은 조건에 따라 변한다.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모든 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고정된 거리이겠지만, 그곳을 어떻게 도착할지에 대해선 각각 다르며 그 거리를 길다고 느낄지, 짧다고 느낄지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동 수단이 없는 사람에게는 걸어가야 한다는 선택지 뿐으로 도저히 도착할 수 없는 거리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마음만 먹으면 전용기로 당장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이동을 도와주는 행위 또한 고정된 선행일 수 없고 상대적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도와준 것이라고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는 그것을 큰 은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의 기본 상태는 자유로운 상태이며 자유(선택)의 훼손은 잠재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잠재비용에 대한 간과는 심리적비용을 간과하는 행위이다.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 비율, 잠재비용, 감정적)를 중요시하는 사람과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만족도 비율, 명목비용, 이성적)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위의 썰에서 신입사원 부대찌개가 먹고 싶었을까? 명목비용은 7천 원이지만, 잠재비용은 각자 다르다. 7천 원이라는 돈(자유, 권리)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에 신입사원에게 있어서 부대찌개는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면, 신입사원은 점심값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이미 그 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사달라고 한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 받은 비용에 대해서 그 비용은 서로 같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신입사원이 아니꼬와서, 이태까지의 비용을 돌려달라고 한다면, 신입사원은 그 돈으로 마땅히 자유롭게 선택했어야 할 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 누군가에게 비싼 선물을 받았는데, 그다지 필요도 없고 쓸모없는 물건이었고, 나중에 관계가 틀어져서 그 선물의 비용을 돌려달라고 한다. 그렇다면 모든 비용을 돌려주고 싶은가? 비용과 가치는 비례하지 않으며 가치는 비용보다는 효용성이 결정한다.

 

즉, 신입사원의 입장에서는 여태까지 처먹기도 싫은 부대찌개를 강제로 처먹은 것에 대한 모든 비용의 합산이, 이번 점심값을 내는 것의 비용을 초과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모든 인간의 기본 상태는 계약의 자유와 평등이 있음을 간과하여선 안 된다. 공짜로 먹을 것을 줬다는 것 또한 보상이 아닐 수 있다. 사람은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으며(물론, 더 먹을 수는 있겠지만 살이 찌고 건강을 유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 또한 누군가에게는 하루에 먹을 수 있는 기회(잠재비용, 기회비용)를 회사에서 강제로 소모(손해, 손실)시킨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손해에 대한 보상으로 그나마 공짜라는 것으로 저울을 맞추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잠재비용의 손실은 비용이 들지 않았다는 것으로 저울을 맞춰 상쇄되어 사라졌을 수 있으며, 그런데 나중에 점심값을 내달라는 요구는 온전한 손해로, 다른 한 쪽 저울에 아무것도 올릴 것이 없는 폭력적인 요구로 들릴 수 있다. 신입사원에게 처음부터 너의 선택이 개입할 수 없는 점심 메뉴에 대한 비용을 나중에 낼 것인지 계약할 자유를 주었다면 신입사원이 계약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 한번 생각해 보자.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이 처먹고 싶은 음식은 그 사람이 처먹으면 될 일이지, 나는 내가 내 돈을 내고 먹더라도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고 기분도 좋다. 그에 대한 비용으로 마땅히 내 돈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처먹기 싫은 걸 처먹는데 대체 왜 내 돈을 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동의도 할 수 없다. 나는 솔직히 이 모든 구도 자체가 신입사원에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가 좆같으면 문화가 사라져야지 왜 신입사원이 욕먹어야 하는가? 1달간 신입사원에게 메뉴 선택권도 같이 줬다면 신입사원이 왜 점심을 사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겠다고 하는 신입사원이 있다면 나는 그제야 신입사원을 같이 욕할 것이다. 하지만, 자유와 평등은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이 살아있음에도 자유가 없다면 그 인간은 이미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많은 심리학적 연구들이 선택의 자유는 행복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자유로운 돈은 스스로 가치(효용성)를 찾아갈 수 있으나 부자유한 돈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둘의 명목비용은 같다고 할지라도 자유로운 돈은 자유의 가치를 내포하며 비용 대비 효용이 더 높다. 자유는 마진율이 매우 높은 고부가가치이며 부자유는 박리다매거나 오히려 적자일 수도 있다. 같은 금액(명목비용)이라도 정말 필요할 때 필요한 물건의 효용과 필요하지 않은 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의 효용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런닝맨' 출연자들이 같은 출연자인 지예은의 집들이 선물을 주려고 사비를 들여 냄비 세트, 욕실 청소용품, 라면 조리기 등을 구매하였고, 선물로 주려고 했으나 지예은은 선물들이 너무 감사하지만 골라서 받겠다고 하고 대부분의 선물을 받기를 거절하여 논란이 되었고 일부 사람들이 지예은을 비판한 사건이 있다. 나는 이 논란, 사건 또한 마찬가지로 지예은의 거절할 권리(자유)를 지지한다. 출연자들의 마음은 너무 감사하나, 받아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집에서 공간만 차지할 것을 스스로 예견할 때, 이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물론, 일부 사람들은 설사 그렇더라도 일단 받는 것이 예의라고 한다. 이 의견 또한 나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보다 (효율성과 합리성을 포함한) 자유는 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며, 이를 떠나서 지예은이 선물을 필요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거절한 것이 그렇게도 싸가지없는 일인 것인지 나는 의문스럽다. 집안의 공간이라는 것도 한정된 잠재비용(기회비용)이며 스마트폰의 흠집 하나만 생겨도 하루 종일, 또는 흠집이 존재하는 기간 내내 그것이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의 집에 선물 받은 물건(쓸모없는 물건)이 그러한 흠집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 그렇게도 욕먹을 짓인가? 물론, 선물을 거절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유쾌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상대방을 위해서 준비했는데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거절할 자유가 없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는 매우 동의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위해서 준비했다는 선물을 상대방이 거절한다면 애초에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는 명제 자체도 매우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을 위했다면 상대방이 받아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선물해야하는 경우에 상대방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고 그것을 선물해 준다. 병신새끼들은 이 간단한 일을 왜 이렇게 어렵게 돌아가고 헤매는 것인지 또한 매우 의문스럽다. 선물을 거절당하면 마음이 상하는 것도 이해하겠지만, 필요 없는 선물을 받는 것도 마음상하는 일이다. 이래저래 서로 좆같다면 서로 보지 않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선물도 안 받아, 안 받아서 좆같애, 거절도 못해, 거절해도 좆같고 거절 못해도 좆같애, 이게 뭔 좆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지예은이 정말 원하는 선물 하나를 물어보고 다같이 더치페이, 엔빵해서 줬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 내가 너무 어려운 유토피아 같은 것을 혼자 상상하는 것인가? 자유 속에 합리와 효율, 효용, 행복이 전부 들어있다. 부자유 속에 갈등과 고통이 있지 않은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아닌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다. 도움받는다, 받았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에게서 어떤 사람이 돕고서는 혼자서 도와줬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도와줬는데 도와줬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부자에게 기부하면 부자가 고마워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도와달라고 하기 전까지 돕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참견하지 말라. 도움이라고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고맙다고는 눈꼽만큼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고마움은커녕 분노만 살 것이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도와준다면 아주 최소한 그 행위를 도움이라고는 생각할 것이다. 필요 이상의 행위는 항상 과유불급이다. 신발을 이미 신고 있는 사람에게 신발을 주면서 고마워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다리가 4개로 보이는 정신병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

 

 

여우와 두루미가 같은 테이블에서 같은 음식을 같은 비용을 내고 먹었어도 최종비용은 각자 다르다. 여우가 느끼기에 좋은 음식을 두루미에게 대접했지만, 두루미는 나쁜 음식으로 느꼈고, 두루미는 (여우에게, 상대방에게)나쁜 음식으로 되돌려준다. 스스로 느끼기에 좋은이 아닌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을 신경써야만 그 상대방도 나를 신경쓰지 않겠는가? 결국, 자기자신만을 신경쓰면서도 상대방이 나를 신경써주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이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비용을 잘못 계산하는 정신병자는 누구인지 도와주고도 칼 맞기 싫으면 잘 계산해 보아야하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는 모든 계산이 합리적이더라도 상대방이 그저 또라이라 칼맞을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이며 단편적 계산으로는 다차원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도움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대방의 빈 부분을 찾는 것부터 시작이다. 칼 들고 아무나 쑤시지 마라.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사람을 죽여줘야하지 않겠는가? 도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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