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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자가 되는 이유

데라우스티오 2024. 3. 16. 03:51

결정론자들은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우주 자체가 컴퓨터의 동영상 파일처럼 동영상 파일을 재생하면 흐름(시간)은 존재하지만, 각 시간대별로 이미 한 편의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재생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들이 삶에서 믿는 것 중의 하나는 나에게 행복이 얼마나 주어질지 또는 자신이 성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요인을 100%(또는 90% 이상) 유전자에 의한 결정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이것을 믿을 때, 얻는 한 가지 이점이 있는데. 자신의 현재 놓인 상황과 열등한 자신에 대해서 변명이 가능하고 특히 책임에서 벗어나 죄책감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우리의 능력이 수치로 나오지 않지만, 온라인 게임들은 모든 것이 숫자로 정량적으로 표기가 되는데. 이것을 게임으로 생각해보자면 어떤 유저 A와 B가 PvP(Player versus Player)를 했는데 두 명 전부 레벨이 같아 스탯의 총합이 같고 장비의 수준이 동일한 상태일 때 유저 A가 PvP에서 패배했을 때, 변명거리는 찾기 어려울 것이며 자신의 잘못된 전략과 판단, 실력으로 인해서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보충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레벨 차이가 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A의 레벨은 98, B의 레벨은 99였다면 어떨까? 스탯의 총합은 같지 않게 되고 정말 미세한 차이로 졌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레벨만 같았다면 내가 이겼을 터라고 생각할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패배의 책임도 다른 것들보다 레벨에 전가된다. 미세한 차이라면 사실 꼭 레벨이 아니더라도 조금 더 잘 플레이했더라면 이겼을 수도 있지만 레벨이 상대방과 같았다면 플레이를 똑같이 했더라도 이겼을 것이기 때문에 부족하거나 모자란 다른 요소보다도 패배의 책임으로써 레벨이 지목된다. A의 레벨이 70, B가 99라면 어떻게 지더라도 잘못된 전략이라든지, 잘못된 판단이라든지의 성찰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레벨 때문에 진 것이고 잘못된 것은 오로지 레벨뿐이며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전략과 판단은 자신의 책임이지만 부족한 레벨 차이로 인한 패배의 책임은 레벨에 있는 것이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A의 레벨이 1이라면 PvP의 패배의 책임에 대해서 면죄부가 있는 것과 다름없는데 이 경우 잘못된 전략, 판단이라는 것에 대한 것마저도 면죄부가 주어진다. 레벨이 1이라면 무엇이 올바른 전략, 판단인지도 모르는 것이 용인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식으로 정리하자면 '패배의 책임=레벨×장비의 수준'일 것이다. PvP의 패배의 책임은 레벨이 낮고 장비의 수준이 낮을수록 그 책임에서 멀어진다. 패배는 패배가 아니게 되며 죄는 면죄되어 죄책감을 가질 필요 또한 없어진다. 레벨이 만렙이며 장비가 풀강일 때, 패배의 책임은 누구한테,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다. 자신의 미숙함만이 패배의 원인, 책임이 되고 패배와 그 죄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다. 이 패배의 책임에 대한 공식을 게임이 아닌 인생에 대해서 다시 쓰자면 '삶의 책임=유전자×사회의 수준'이라는 식으로 바꿔볼 수 있다. 이 식은 결정론자들에게 있어서 마지노선이자 교리와도 같은데 그 이유는 현재 내가 처한 상황과 나의 열등함에 대해서 패배에 대한 책임이 게임에서 레벨이 낮을수록 면죄부를 갖듯이 나의 유전자는 한없이 형편없어서, 즉, 나의 유전자의 레벨은 1이라서 현재 자기 삶에 대해서 면죄부가 주어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나는 해도 안 될 것이라는 말은 자조가 아닌 자위이다. 나는 해도 안 될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으니 해도 안 되는 것은 당연하고 해도 안 되는 것이 당연하기에 그에 대한 책임은 유전자에 있고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패배와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유전자, 부모, 사회 탓을 할수록 책임과 자신은 분리되고 멀어진다. 이것은 마치 방에서 TV로 올림픽 경기를 보듯 하다. 자신의 경기에 대해서 스스로 방관자가 되는 것이다. TV를 보기만 했을 뿐인 사람이 그 경기의 어떤 선수의 패배 원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책임 또한 없으며 오로지 경기를 뛰고 있는 그 경기의 선수가 그 책임을 온전히 갖기에 결정론자들은 그 올림픽 경기장에 유전자, 부모, 사회라는 자국의 선수를 출전시키고는 자신은 그저 TV 앞에서 리모컨을 들고 관람하는 것이다. 그 경기에서 그들이 진다고 하더라도 TV 앞에서 경기를 시청만 했을 뿐인 자신에는 책임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그 경기를 직접 뛴 선수들만이 책임을 갖기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가 되는 것이다.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 Couch(의자)에 앉아 Potato(감자칩)먹는 사람,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텔레비전만 보는 사람.
 

자신의 유전자를 내리깎을수록 자신의 열등함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의 못남에 대한 악평은 끝이 없다. 자신은 무엇을 해도 안 될 것이라든지, 자신은 재능이 없다든지, 자신은 유전자가 안 좋다든지, 타고난 게 없다든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2대2 팀 게임에서 팀원인 유전자를 탓하는 것과도 같다. 5대5 팀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 LoL)에서도 게임이 질 거 같으면 팀원에게 욕을 하며 탓하고 패배의 책임을 돌리려는 사람이 있다. 이것 또한 자신과 패배를 분리하는 행위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게임의 패배는 나에 의한 것이 아닌 팀원에 의한 패배가 된다. 나는 잘했는데 팀이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전자가 제대로 플레이를 못 한 탓에 게임을 지는 것이지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유전자 외부적인 책임 전가도 있는데 부모를 잘못 만났다든지, 자신의 가정은 재산이 너무 적다든지, 사회가 좀 더 좋은 시스템이었으면 이라든지, 교육 체계가 안 좋다든지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정말 문제라서 문제라고 주장한다기보다 이것들이 문제여야만 하므로 이것들을 문제라고 하는 것아다. 만약 이런 것들을 정말 해결해준다고 하여도 그들은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문제가 없고 유전자도 문제가 없다면 그들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더욱 끔찍하다.
 

마주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책임이다. 그들은 책임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현실을 왜곡하고 그저 리모컨만 움켜쥐고 소파에 누워 TV만 보고 과자를 먹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이란 TV에서 나오는 타인의 일과도 같은 것일까? 아니면 타인의 일이었으면 하는 것일까? 이것은 마치 자신의 집이 더러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청소를 절대하지 않는 사람과도 같아 보인다. 원래부터 집은 더러운 채로 지어졌으며 원래 집이란 더러운 것이 당연한 것마냥 말이다. 삶에 있어서 유전자가 결정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가 되는 것이 결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위 사진은 1,758캐럿 다이아몬드 원석이다. 다이아몬드 원석 또한 세공 과정을 거쳐 깎아내지 않으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아무리 좋은 유전자를 타고났다고 하여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수식 마지막에 0을 곱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큰 수라도 0을 곱한다면 결괏값은 0이 된다.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은 잠재력일 뿐이지 잠재력이란 행위 없이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하지 않는다면 그저 조금 반짝거리는 돌멩이일 뿐이다. 삶에서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보다 그것을 실현하는 행위가 결정하는 것이 많다. 고로 '삶의 책임=유전자×사회의 수준'이라는 식은 잘못되었으며 이 식은 고쳐져야 한다. '삶의 책임=행위×반복 횟수'로 말이다. 우리가 위대함으로 나아갈 때, 그 행위를 반복할 때 애벌레는 나비로 우화하고 자유를 갖는다. 땅바닥을 기어 다닐 자유를 자유로 착각하지 말라. 우리에겐 하늘을 날 자유가 있다.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당신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의 축적물이다. 탁월함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습성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