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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라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

데라우스티오 2024. 11. 1. 15:10

그런 말이 있다. 외로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결혼해보라 한다.
결혼하면 진정한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으므로,
 
그렇다면 외로움을 채우고자 결혼함에도 외로움이 깊어지는 원인은 무엇인가?
모든 외로움의 갈증은 나라는 주체가 주체로서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서 객체로 인지되는 것에서 끝없는 갈증으로 타들어 간다.
 
결혼을 했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봐주길 바란다. 나는 누구의 배우자도 아니고 나는 누구의 부모도 아니고 나는 나일 뿐이므로 그것을 가장 먼저 봐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인간 밑에 꼬리표가 붙는 것이다. 가장 먼저 봐주길 원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다.
 
부모가 자식을 관계로서 본다면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고 희생을 의심한다. 그 희생은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주체로 행해지는 행위이지 나를 바라보고(인지하고) 행해지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달갑지 않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으로 본다면 깊고도 얕다. 자식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의 자식이니까 이며, 자식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는 이유는 나의 자식이니까 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식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자식이 아니라면 나를 사랑하지 않겠네. 나와 나의 꼬리표를 분리해보니 나의 가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꼬리표(자식)에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자식이 이것을 인지하면 외로움은 깊어지고 공허감에 빠진다. 모든 인간은 꼬리표(관계 등) 밑에 붙은 꼬리표(인간)가 아니라 꼬리표가 인간 밑에 붙어있는 꼬리표임을 천 번 만 번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주체이며 대상이어야 하지 그저 꼬리표로 통하는 통로로 인지되어선 안 된다. 부모가 나를 자식이므로 사랑해줘선 안 된다. 자식이므로 헌신해서는 아니 된다. 부모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해하고 자식이므로 사랑해주는 것이 아닌 내가 나다움으로써 사랑받을만하므로 사랑해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은 꼬리표일 뿐이며 사랑의 주체는 꼬리표가 아닌 내가 되는 것이다.
 
결혼은 내가 결정한 일인데 누구의 배우자, 누구의 부모라는 것은 내가 꼬리표의 인간이 돼버린 것이다. 꼬리표란 인간의 꼬리표이다. 인간이 먼저이다. 내가 누구의 배우자인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나의 배우자이다. 내가 누구의 부모인 것이 아니라 자식이 나의 자식이다. 배우자가 나를 돈 벌어오는 가장, 애 키워주는 엄마로만 본다면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외로움만 덩그러니 있다. 나 또한 그러하고 나의 배우자 또한 모든 꼬리표 이전에 자신다움을 간직한 인간이다. 그것을 서로 봐준 후 그다음 꼬리표를 읽어주어야 외로움은 그제야 타들어 가는 갈증에서 해방된다. 꼬리표는 나와 동체이지만 결코 동체는 아니며 남들은 그게 그거 아니야? 라고 아무리 말해도 나와 나의 클론은 다르다. 나의 클론은 나의 복제품이며 내가 죽으면 내가 죽는 것이며 클론이 나일 수는 결코 없다. 물론 타인들은 결코 그것을 알아챌 수 없고 똑같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내가 알며 내가 그 외로움의 갈증을 알며 타들어 가는 갈증 속에서 아우성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