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점수(頓悟漸修)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 단계가 따름을 이르는 말.
돈오돈수(頓悟頓修)
오(悟)와 수(修)를 한 순간에 모두 완성하는 것. 한 번에 깨닫는 것을 말한다.
※悟: 깨달을 오
※修: 닦을 수
돈오점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며,
돈오돈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돈오점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가 자신이 돈오점수하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지 따지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라지만 마음은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술로 생각해 보자면 자신의 무술이 최강의 무술(돈오돈수)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있지만, 그 인간의 삶을 보니 아무런 수련{점수(漸修)}을 하지 않는다. 매일 수련을 하는 무술가 입장에서는 상당한 합리적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경기를 해보니,
요상한 움직임만 보여주더니 맞고 뻗어버린다. 그렇다면 이것을 최강의 무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돈오돈수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돈오돈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깨달음이 정말로 깨달음이라면 단 1번의 깨달음이라도 이미 수행 또한 완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당구를 치는 사람이 단 1번의 타격 후 가만히 서 있기만 하지만, 모든 당구공이 구멍 안으로 들어간다. 1번의 타격이 정확하다면 그 1번만으로도 모든 당구공이 구멍 안으로 돈오돈수(頓悟頓修)하지만, 애초부터 1번의 타격(깨달음)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기다려도{점수(漸修)하여도} 공은 결코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 만큼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에디슨은 어느 인터뷰에서 어떻게 성공적인 발명을 했는지 질문받았고 성공은 99%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답하였다. 추후 사람들은 이 말뜻이 99%의 노력{점수(漸修)}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에디슨은 1%의 영감{돈오(頓悟)} 없이는 99%의 노력이 가치가 없음을 뜻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어떤 상품을 발명함에 있어서, 그것의 상품성, 시장 가치를 잘못 파악한 채로 끝 없이 노력만 한다고 해서 결코 그 상품이 성공적인 상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품성과 시장 가치가 충분한 상품을 가지고도 마케팅 등의 홍보 및 판매 시도를 하였을 때마저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인데, 애초부터 상품성도 시장 가치도 없는 상품을 가지고 천문학적인 마케팅 비용을 들인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겠는가? 그만큼 1%의 영감{돈오(頓悟)}은 중요하다. 노력{점수(漸修)의 가치는 영감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지만, 1%의 영감만으로, 그 상품을 생각하였다는 것만으로(깨달음) 결코 부자(완성)가 될 순 없다. 99%의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깨달았지만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구대를 보라, 1번의 타격 후 사람은 서 있기만 하며 시간이 흐를 뿐이다. 책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닌, 펼치기만 하는 것이다. 1번의 타격 시점(과거)에서 동시에 그 결과(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
시간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시간은 단지 우리를 펼쳐 보일 뿐이다. -막스 루돌프 프리슈(Max Rudolf Frisch)
올바른 돈오(頓悟)란, 올바른 점수(漸修)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돈오(頓悟)의 순간, 이미 돈수(頓修)된 것이다.
점수(漸修, 노력)한다는 것이 돈오(頓悟, 깨달음)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며 돈수(頓修, 완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돈오(頓悟)한 무술가는 점수(漸修)하며 이미 돈수(頓修)된 것과 같다. 돈오돈수(頓悟頓修)는 필연적인 돈오점수(頓悟漸修)로 완성된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그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체를 조망하고 한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보자. 그 삶이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한 한 인간의 삶에서 자유의지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았을까? 이 역시 두 가지의 주장으로 나뉜다. 자유의지는 있다는 파와 자유의지란 없다는 파이다.
벤자민 리벳 (Benjamin Libet)은 미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자이며 1980년대에 대상자가 어떤 버튼을 누를지를 선택하도록 하는 실험을 하였고, 실험대상자가 어떤 버튼을 누를지 결정하기 수백 밀리초 이전에 행동과 관련된 뇌 부위가 이미 활동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즉,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의지→전기 신호→행동'의 순서여야 했지만,
비록 시간의 간격이 크진 않더라도 그 순서가 '전기 신호→의지→행동'의 순서였음을 밝혀낸 것이다.
※행동하기 0.55초 전에 뇌의 전기 신호가 활성화되고 실험 대상자들은 행동하기 0.2초 전에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행동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인지한다.
이 실험은 많은 논란을 만들었고 2007년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의 과학자들에 의해 종식된다.
연구팀은 14명의 실험 대상자들에게 왼손과 오른손에 각각 버튼 하나씩을 주고, 원할 때 하나의 버튼을 누르도록 하였고 그 버튼을 누르겠다고 결정한 시점이 언제인지 알려주라고 하였다. 그동안 연구팀은 뇌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관찰하였고 그 결과 결정을 내리기 수 초 전, 최대 10초 전에 이미 뇌의 운동피질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존-데일란 하인즈(John-Dylan Haynes) 교수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별로 없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2011년 LA 캘리포니아 대학의 신경 과학자인 이작 프라이드(Itzhak Fried) 박사는 더 나아가 대상자의 뇌에 전극을 이식하고 뇌의 활성화를 관찰하는 방식으로 실험하였는데, 이러한 실험에서 박사는 실험 대상자의 판단보다 1초 전에 실험 대상자가 버튼을 누를 것을 결정했다는 예측하였고 어느 쪽을 누를지에 대해서는 80%의 확률로 예측하였다.
과거, 중증 간질환자의 치료법으로 좌반구와 우반구를 이어주는 뇌량을 절단하였던 적이 있었다. 뇌량이 절단되면 좌뇌와 우뇌는 서로 통신하지 못하며 그에 따른 증상을 분리뇌 증후군(Split-brain syndrome)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리뇌에 대한 연구가 2세대 인지과학 분야를 개척하고 세계적인 뇌과학자이자 심리학자 그리고 인지신경과학도들의 교과서인 《인지신경과학Cognitive Neuroscience》의 저자 마이클 S.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와 미국의 신경심리학자이며 신경과학자이고 인지과학을 개척한 인물로도 알려진 로저 울컷 스페리(Roger Wolcott Sperry)에 의해 연구되었다.
※왼쪽 눈으로 본 시각 정보는 우뇌만이 인지할 수 있고 오른쪽 눈으로 본 시각 정보는 좌뇌만이 인지할 수 있다.
※좌뇌는 언어 뇌라고도 하며 언어중추가 자리 잡고 있다. 좌뇌가 발달하면 언어 구사 능력, 문자나 숫자, 기호의 이해, 조리에 맞는 사고 등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능력이 뛰어나다.
분리뇌 증후군인 사람의 왼쪽 눈에만 Walk(걸어가다)라는 문구가 보이게 하자. 일어나서 걷기 시작하였고 왜 걷느냐고 물어보자, 분리뇌 증후군인 사람은 콜라를 마시러 간다고 대답하였다.
우뇌로부터 걷는 이유에 대해서 정보를 공유받지 못한 좌뇌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내어 대답하였다. 걸으라는 문구를 보았다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콜라를 마시러 간다고 대답한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음에도 좌뇌는 스스로 콜라를 마시러 간다는 의지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였다고 착각한다. 어쩌면 의식이란 행동의 원인이 아니며 부산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점수(漸修, 행동)란 돈오(頓悟)의 부산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돈오(頓悟, 깨달음, 원초, 원인)는 행동이라는 부산물(점수, 시간, 과정, 행동, 인과)을 동반하며 돈수(頓修, 결과, 완성)는 필연적이다.
올바른 원인에는 올바른 인과와 올바른 결과가 필연적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묶인 필연적인 하나이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올바른 인과로 올바른 원인과 올바른 결과가 생겨날 순 없으며 과거, 현재, 미래는 필연적인 하나로 당구 큐대가 당구공을 타격할 때 과거, 현재, 미래는 그 순간에 동시에 생겨난다.
물에 빠진 당신은 숨을 쉬기를 노력하는가? 그것은 필연적인가?
깨달음이란 물에 빠지는 것이다. 물에 빠진 인간은 숨쉬기를 결코, 점수(漸修)하지 않는다.
물에 빠진 순간, 이미 돈수(頓修)이다.
사는 것은 고통받는 것이고, 살아남는 것은 고통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삶의 의미란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인내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바다에서는 조금만 쉬어도 가라앉으며 숨이 막힌다. 단 한 순간도 숨을 쉬기 위해서, 쉴 수 없다.
한낱, 점수(漸修)하는 인간은 결코, 돈수(頓修)할 수 없으며
한낱, 점수(漸修)하는 인간은 결코, 돈오(頓悟)한 인간보다 열정적으로 숨 쉬지 않는다.
바다에 빠진 인간과 땅 위에 서 있는 인간, 누가 더 열정적으로 숨을 쉬겠는가?
누가 더 열정적으로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불 보듯 뻔하다. 바다에 빠진 인간이다.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주듯이 잘 쓰인 일생은 평안한 죽음을 준다.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무술 시합에는 규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무술 시합의 우승자란 예고도 없이 후두부를 가격하는 사람이 우승자가 될 것이다. 시합 없이 무술의 우열을 가를 수 없듯, 규율 없는 깨달음도 정답이 아니다.
규율 없는 깨달음이란 단 한 번의 싸움 없이 자신이 최강이라고 주장하는 무술과도 같다.
싸운 적 없는 최강의 무술과 지킬 것 없는 깨달음이 무엇이 다른가? 규율도 없는 자들이 깨달은 척한다.
규율을 알려주겠다.
⑴사회에 보탬이 되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될 것.
⑵는 없다. 끝이다.
※규율은 사실 더 있다. 하지만 나머지는 인간의 영역이 아닐 수 있다. 5개의 암호가 맞아야만 열리는 금고가 있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1개의 암호를 맞춰볼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이다. 나머지 4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깨달은 척하지 말라.
고통스럽지 않은 척하지 말라.
행복한 척하지 말라.
돈수(頓修)한 척하지 말라.
진실로서 돈오(頓悟)하라.
진실로서 돈수(頓修)하라.
이 세계의 가치 기준은 모두 죽음으로부터의 거리로 측정된다. -무묘앙에오(無明庵回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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