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양동이에 물을 받은 뒤 손을 담가보았다. 미지근하다고 느껴졌고 그 사람은 그 물이 미지근한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후 두 양동이를 더 준비했다. 각 양동이에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받았다. 왼손은 차가운 물을 받은 양동이에, 오른손은 뜨거운 물을 받은 양동이에 넣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왼손은 차가워졌고 오른손은 뜨거워졌다. 왼쪽 양동이의 물은 차갑고 차가운 물이고 오른쪽 양동이의 물은 뜨거운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제일 처음의, 미지근한 물이 담겨있던 양동이에 양손을 넣었다. 왼손에서는 그 물이 따뜻한 물이라고 느껴졌고 오른손에서는 그 물이 시원한 물이라고 느껴졌다. 양동이에 든 물은 미지근한 물일까? 따뜻한 물일까? 시원한 물일까?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측정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사람이 들판에 서 있었는데 바람이 불었고 시원함을 느꼈다. 바람의 온도는 몇 °C일까? 아마 36.5°C(체온)보다는 낮을 것이며 그 바람에 의해서 체온이 떨어졌을 것이다. 바람의 온도는 그대로인 채 그 사람의 체온이 바람의 온도보다 낮아졌다면 그럼에도 바람은 여전히 시원한 바람일까? 아닐 것이다. 이제는 바람의 온도가 체온보다 높으며 그 바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의 체온을 떨어트리는 것이 불가능하며 바람은 오히려 체온을 올려주게 된다. 들판 위의 사람은 그가 시원하게 느꼈던 동일한 바람을 이제는 따뜻하다고 느낄 것이다. 바람은 변한 것이 없을지라도 기준이 변하면 대상도 변한다.
우리는 물질의 속성을 그 물질에 내재한 속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물질의 속성이란 그 물질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라는 기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자신에게 내재한 것을 그 물질(대상)에게서 관찰(표상)해내는 것이다. ※속성: 사물의 현상적 성질.
우리 인간은 색상(Color) 또한 그 물질이 가진 속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색상은 물질이 소유한 것이 아닌 태양(빛)으로부터 온 것이다. (백색의) 빛을 프리즘(삼각형 모양 유리)에 통과시키면 (백색의) 하나의 빛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무지갯빛의 가시광선으로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프리즘에서 나온, 끝과 끝에 위치한 적색(Red)에서부터 자색(Purple)까지의, 보통 400nm에서 700nm까지의 주파수 범위의 가시광선을 눈으로 분별해낼 수 있다.
이러한 빛은 흡수, 반사, 투과라는 3가지 성질을 가졌다. 빛은 물질에 따라 그 물질 안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그 물질에 흡수되거나 그 물질을 그대로 통과하여 투과되거나 그 물질의 표면에서 반사된다. 어떤 물질이 가시광선 영역의 모든 파장을 그대로 흡수한다면 반사되는 빛이 없어, 우리의 눈에 도달하는 빛의 파장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물질은 흑색으로 보이게 된다. 반대로 어떤 물질이 모든 파장을 반사한다면 우리의 눈에는 백색으로 보이게 된다. 어떤 물질은 모든 파장을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것이 아닌 일부는 흡수, 일부는 반사할 수도 있다.
어떤 물질이 660nm~750nm 파장의 가시광선 영역의 빛을 반사하고 나머지 가시광선 영역을 전부 흡수한다면 그 물질은 우리 인간의 눈에는 적색으로 보일 것이다. 다른 색상 또한 같은 원리이며 색상이란 물질이 소유하거나 물질에 내재한 속성이 아닌 빛이 물질에서 (전부 또는 일부가)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온 것이다. 거울을 보면서 거울 속에 세상이 하나 더 있다고는 생각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거울 속 세상은 단지 반사된 것이니 말이다. 거울 속에 비친 것들은 거울이 소유한 것이 아닌 외부의 것을 똑같이 따라 한 것일 뿐이다. 거울은 모든 가시광선 파장을 반사해내지만, 거울이 아닌 물질들은 일부의 가시광선 파장만을 반사해내는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울이 하나의 세상을 더 가진 것이 아니듯 물질들 또한 색을 소유한 것이 아니며 빛을 눈으로 반사하고 있다.
레일리 산란(Rayleigh Scattering)은 전자기파(빛)가 파장보다 매우 작은 입자에 의하여 탄성 산란하는 현상이다. 빛이 기체나 투명한 액체 및 고체를 통과할 때 발생한다. 빛은 그 파장보다 작은 입자를 만나면 모든 방향으로 산란하게 되는데 태양 빛이 지구의 지면에 도달하면서 대기(주로 산소, 질소)와 접촉하게 되면 모든 방향으로 산란하게 되는데 짧은 파장(푸른색 계열)일수록 더 많이 산란하게 되어 하늘은 푸르게 보이는 주된 이유이다. 하지만 해 질 녘에는 노을은 붉게 보이는데 그 이유는 태양이 관찰자의 머리 위에 있을 때는 관찰자와 태양 간의 거리가 가장 짧게 되지만, 해 질 녘에는 관찰자와 태양 간의 거리가 가장 길게 되며 태양 빛이 대기를 만나면 앞서 말했듯이 긴 파장보다 짧은 파장이 더 많이(더 먼저) 산란이 일어나게 되어 긴 파장(붉은색 계열)은 덜 산란하게 되어 짧은 파장보다 더 먼 거리를 나아간 뒤 산란하게 된다. 그로 인해, 해 질 녘에는 관찰자에게 하늘이 붉은색으로 보이게 된다. 해 질 녘에도 하늘이 붉게 보일지라도 (지구에서) 태양과의 거리를 줄인다면, 짧은 파장이 산란하는 곳으로 간다면 하늘은 푸르게 보일 것이며 마찬가지로 하늘이 푸를 때도 태양과 거리가 더 멀어진다면 붉은 하늘로 바뀔 것이다. 즉, ⓕ'같은 하늘을 두 명의 관찰자가 동시에 바라본다고 하여도 서로 다른 위치에 있다면 서로 다른 것(시각 정보)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소리와 빛은 파동(주파수)으로, 소리의 경우 어떤 파동의 파동원과 관찰자의 상대 속도에 따라 그 파동의 진동수와 파장이 바뀌는 현상(왜곡)이 일어나며 이를 도플러 효과(Doppler Effect)라고 한다. 파동원이 관찰자로부터 멀어질 때는 소리의 파장이 길어지게 되고 진동수는 감소하여 낮은 소리로 들리게 되며 파동원이 관찰자로부터 가까워질 때는 소리의 파장이 짧아지게 되고 진동수는 증가하여 높은소리로 들리게 된다. 즉, 소리 역시 같은 대상이라도 위치에 따라 다르게 인지된다.
우리가 지구에서 우주를 관찰할 때, 보이는 모든 대상들의 색은 실제보다 더 붉게 보이게 되는 적색편이(Redshift)가 일어난다. 적색편이란 전자기파 등의 파장이 어떤 원인에 의해 스펙트럼상에서 표준 파장보다 장파장으로 자리 이동하는 현상이며 같은 빛의 방출이라도 먼 곳에서 오는 빛일수록 에너지가 약해지게 되고 진동수 낮아진다. 빛의 진동수가 낮아질수록 우리 인간의 눈에는 적색으로 인지된다. 우주를 관찰할 때 일어나는 적색 편이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도플러 효과가 있다. 우주는 공간은 현재 팽창하고 있으며 공간이 팽창함에 따라 우주의 모든 것들은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지구의 반대 방향으로 멀어짐에 따라 도플러 효과가 일어난다. 파장의 길이는 길어지고 진동수는 줄어들어 실제(정지상태)일 때보다 더 붉게 보이게 된다.
※실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우리 인간은 실제(이데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정지상태를 실제라고 규정하였을 뿐, 애초에 적색편이가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색상이란 그 물질이 가진 것이 아니므로 애초부터 정지 상태라고 하더라도 실제가 아닌 것이며 또한, 정지 상태이나 운동 상태이나 두 경우 전부 관찰자가 그렇게 실제로 인지해내는 실제이지 허상이 아니다. 사실대로 표현하자면 실제보다 더 붉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실제로 더 붉게 보이는 것이라 하는 편이 더 실제적인 표현일 것이다. 모든 것은 실제(진실)이다. 허상(거짓)은 없다.
구름의 경우는 미 산란(Mie Scattering)에 의해서 구름이 하얗게 보인다. 미 산란은 입자의 크기가 빛의 파장과 비슷할 경우 일어나며 빛의 파장보다는 입자의 밀도, 크기에 따라서 반응하기에 레일리 산란에 비하면 파장의 의존도가 낮다. 수증기나 매연 알갱이 등과의 충돌이 미 산란에 해당하며 구름이 백색으로 보이는 이유도 구름의 작은 물방울이 태양의 모든 파장의 빛을 그대로 산란시키기 때문에 백색으로 보이게 된다.
빛은 합성될수록 백색에 가까워지며 가시광선의 모든 파장을 그대로 반사하는 물질은 백색으로 보이게 된다.
인간은 적색에서부터 자주색까지의, 보통 400nm에서 700nm까지의 주파수 범위의 가시광선을 눈으로 분별해낼 수 있으며 적색의 바깥 약 700nm를 초과하는 파장인 적외선이나 자주색의 바깥 약 400nm 미만인 파장인 자외선은 존재함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은 감각할 수 없다.
'적색 사과는 적색이다.' 이것은 진리인가? 적색 사과의 적색이 사과가 소유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명제는 진리에 해당할 것이나, 적색이란 사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빛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빛이 없다면 흑색이 될 것이다. 적색 사과는 적색일 수 있는 사과 표면의 성질(패턴,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적색 사과는 빛이 없거나, 약하거나, 백색광이 아닌 경우 적색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백색)빛이 존재하는 곳에 있는 적색 사과는 적색이다.' 이것은 진리인가?
※진리: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는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한다.
빛(광자, Analog)이 눈에 들어오면 망막의 광수용체(Encoding, Analog→Digital)에서 전기 신호(Digital)로 바뀐다. 망막의 광수용체는 원뿔 모양의 원추세포와 막대 모양의 간상세포로 구성된다. 원추세포는 색상을, 간상세포는 명암을 구별한다. 사람의 경우는 적, 녹, 청의 3색의 빛을 원추세포로 구별할 수 있으며 이 삼원색을 조합하며 자연의 모든 색을 구별해내며 침팬지나 고릴라, 일부 원숭이 등의 유인원들 또한 3색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육상 동물은 녹, 청만을 원추세포로 구별할 수 있다. 개, 고양이, 말, 사슴 등이 그렇다. 위 이미지는 수풀 사이에 호랑이가 있는 모습인데 인간의 눈에는 오른쪽의 이미지처럼 보일 것이고 인간은 호랑이를 수풀과 쉽게 구별해낼 수 있지만 사슴은 적색맹으로 호랑이의 붉은 털의 색을 인지할 수 없고 사슴의 눈에는 왼쪽의 이미지처럼 보이게 되어 호랑이와 수풀이 같은 색으로 보이기에 호랑이를 수풀에서 쉽게 찾을 수 없고 호랑이의 붉은 털은 보호색이 된다. 즉, '(백색)빛이 존재하는 곳에 있는 적색 사과는 적색이다'라는 명제 또한 적색맹의 인간 또는 동물에게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것은 절대적 진리일 수 없고 상대적 진리가 된다. 호랑이는 무슨 색인가? 그 답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연유로 색상이란 물질에 내재한 속성이거나 절대적 진리인 것이 아니며 눈의 원추세포와 간상세포가 빛의 주파수(진동수)를 인지하고 그 물리적 신호(Analog)를 전기 신호(Digital)로 변환(Encoding, Analog→Digital) 한 후 그 전기 신호를 뇌로 보낸 것이다. 그 신호를 받은 뇌는 각 주파수 범위 영역마다 색상을 부여하여 우리 자신에게 보여준다(Decoding, Digital→Analog). 즉, 객관적인(절대적) 세계(이데아)에 존재하는 것은 주파수라는 무색무취의 데이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파수 데이터들을 얼마나 인지해낼 수 있냐는 것 또한 생물체별로 상이한 범위(상대적)를 가지며 또한 그렇게 인지해낸 주파수 범위별로 어떤 색상을 부여할 것이냐는 것 또한 상이(상대적)하다. 인간이 붉은 계열의 색을 구분해낸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은 사슴처럼 초록색의 나뭇잎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초록 잎 속에서 적색의 사과 열매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생존에 필요하고 도움 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사슴은 호랑이만 만나지 않는다면 초록색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가 구분해내는 주파수의 범위와 부여한 색상의 종류의 범위는 최초의 인간에서부터 생존 압력을 받았던 그 압력의 정도만큼의 상대성이 우리가 구별해내는 것의 최대범위를 제한해낸다. 곤충 중 일부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역의 빛을 구별해낸다.
벌은 꿀을 가지고 있는 꽃을 찾는데 유용한 자외선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적외선과 자외선 범위의 영역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같은 꽃(절대성)이라도 인간의 관점과 벌의 관점에서 그 꽃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상대성). 소리의 경우 또한 소리라는 것은 공기의 진동수를 일반적인 성인 기준으로 20Hz에서 16,000Hz를 구분해낸다. 공기가 1초에 20번에서 16,000번 떨리는 것을 구분해낼 수 있다는 뜻이며 이 범위 이외의, 공기의 진동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떨리지 않는 0Hz와 동일하다. 그것은 인간 관점의 세계에서는 {색(色)의 계층, 인간이 존재하는 계층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空)과 동일하다. 소리라는 것 또한 객관적 세계에서는 그저 떨림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떨림에 소리를 부여한 것은 뇌이다. 뇌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닌 모든 것에 구별의 효율성을 부여한다. 인간의 가청주파수는 범위는 약 20~20,000Hz이지만 일부 동물들은 이보다 큰 가청 범위를 가진다. 일부 돌고래와 박쥐류는 100,000Hz 이상의 초음파를 감지할 수 있으며 고래 중 일부는 물속에서 7Hz 이하의 초저주파를 감지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공기의 진동이 귀까지 전달되어도 어떤 소리도 감지할 수 없다.
귀신이 존재한다면 귀신은 가시광선 영역 바깥 주파수의 시각 데이터를 발산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가청주파수 영역 바깥 주파수의 소리를 낸다면 인간은 그 귀신을 보거나 귀신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존재를 감각할 수 없다. 귀신끼리는 그것을 감각할 수 있는 기능(기관)이 있다면 우리 인간 주변에서 귀신들이 대화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은 공(空)의 계층의 존재들을 감각할 수 없으며 공(空)들은 공(空)끼리 대화(상호작용)하고 있다.
뇌가 세상에 부여한 (상대적인) 효율성이란 위 이미지에서 가장 왼쪽의 색상을 보면 우리는 그 차이를 바로 안다. 생각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빠르게 구별한다. 가장 왼쪽의 색상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것들을 보면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색상을 보는 것에 비하자면 매우 비효율적이며 느리다. 우리가 색상을 구별할 수 없다면 생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일 것이다. 생물들마다 그 생물이 처한 환경에 따라 구별해내야만 하는 주파수 범위와 색상의 종류는 다르게 된다. 바다 깊은 곳은 빛이 그곳까지 도달할 수 없고 그런 심해에 사는 심해어는 눈이 퇴화하였고 색상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런 심해어가 세상을 검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사슴이 호랑이를 초록색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그런 심해어와 사슴을 보고는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관점을 가진 인간은 자신이 바보인지는 모른다. 태풍의 눈(중심, 관찰자)은 고요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외부, 세계, 대상, 이데아, 객관)을 바라볼 때 그 하늘의 크기란 개구리 자신이 사는 우물(내부, 주관, 인지)만큼의 크기를 갖는다. 우주의 크기란 그 개구리가 사는 우물의 크기만큼 줄어드는 것이며 그와 동일하게 되며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다. 그러한 것을 인지하는 기능은 없다. 모든 색상을 떠올려보라. 떠올리지 못한 색상을 떠올려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슴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붉은 색을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과연 모든 색상을 보고 있는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설사 색상에는 부족함이 없을지 몰라도 그 색상의 존재에 대한 인지에서는 확실하게 부족함이 존재한다. 또한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때 하늘의 크기가 우물의 크기와 동일하기에 하늘 안 개구리가 우물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자신이 가진 정보의 최대치는 항상 하늘 전체(극한값)이지만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의 최대치가 그 전체에 해당하며 그 이외의 모든 경우에서 그보다 작게 보이기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바라볼 때 그 하늘은 하늘로 보이는 것이 아닌 우물보다 더 작은 우물로 보이게 된다. 이것은 착각(왜곡)이다.
개구리에게 보이는 하늘이란 이것이 전부이며 이 전부라는 것은 정말로 전부(실제)이다. 전부라는 것은 100%를 의미한다. 전부 이외에 나머지가 원자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부가 아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이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우물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우물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개구리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우물 밖에 나가 된다면 그제야 자신이 우물 안에 있었음을 깨닫고 그러한 우물의 크기가 작았음을 깨닫게 된다. 우물의 크기는 우물을 나오기 전(인지 전)까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며 작지 않다. 그 우물과 우물에서 보이는 하늘이 전체(우주, 인지의 극한값)이기 때문이다. 우물을 나오지 않는 한 우물의 크기는 우주만큼 큰 것이며 우주의 크기는 우물만큼 작은 것이다.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미래, 자신)는 우물(과거, 타인)을 들여다본다. 아직 다른 개구리(과거의 자신)가 우물안에 있는 것을 보고 말을 건다.
우물 밖 개구리: 너는 우물 안 개구리(오만, 멸시, 혐오, 편협, 왜곡)야.
우물 안 개구리: 그러는 너가 우물(하늘, 대칭, 표상, 투영) 안 개구리야.
우물 밖 개구리: 너가 있는 곳이 우물 안(무지)이야.
우물 안 개구리: 너가 있는 곳도 별로 커 보이지 않는데? (인지의 한계)
우물 밖 개구리: 그건 너가 우물 안에 있어서 그래.
우물 안 개구리: 우물 안에 있는 건 너겠지. 너가 우물(하늘) 밖으로 나온다면 이해할 거야.
우물 안을 나온 개구리는 하늘(오만)이라는 또 다른 우물(자신)안에 갇힌다. 우물 밖과 우물 안은 우물을 두고 대칭을 이룬다. 어느 곳이 우물 안일까? 어는 곳이 우물 밖일까? 우물 안에서도 여전히 하늘의 개구리들은 우물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물 밖에서도 여전히 우물 안의 개구리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그 우물이 또 다른 하늘인 것은 아닐까?
우물 안을 나와 하늘 전체(우주)가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착각, 왜곡)하지만, 지구(확장된 세계, 인지)라는 또 다른 우물에 갇힌 것이다. 지구에서 보는 하늘(제한된 세계, 인지)이란 지구의 하늘만큼의 크기이다. 우물 밖 개구리(인간)는 여전히 하늘(우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없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우주의 크기란 지구에서 보이는 하늘만큼이다. 지구 안 인간들이 지구 밖 우주인들에게 말한다. "너는 우물 안 개구리야." 우주인은 그런 지구인에게 고한다. "너는 우물 안 개구리다."
위 이미지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Cosmic Microwave Background)을 통해 촬영한 우주의 구조이다. 지구 안 인간은 인간 자신의, 우물의 크기만큼 우주를 그려낸다.
자신이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만 있을 뿐 우물 밖을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색상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항상 그 우물 밖을 나오는 시점에서야 과거를 바라보고 자신이 우물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색상에서 한 가지 색상을 더 상상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시점이 되어야만 우리는 한 가지 색상을 덜 보고 있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현재에서는 그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7가지의 색을 구별하는 사람이나 5가지 색밖에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심지어는 3가지 또는 흑백(명암)만을 구별할지라도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색상을 다 구별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상상하지 못하는 색상을 상상할 수 없기에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으므로 오만에 빠진다. 인간은 항상 완전(오만)하며 자신에게 세뇌되어 있다. 세뇌 상태에서는 세뇌를 깨닫지 못한다. 우물 안은 항상 완전하며 우물 밖은 불완전한 것이다. 우물의 경계(끝, 극한)와 우주 경계의 크기는 같다.
저것은 완전하고 이것도 또한 완전하도다. 완전함으로부터 완전함이 생겨 나왔도다.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빼내었으나 여전히 완전함이 남았도다. -《이샤 우파니샤드》
인간의 Hardware(육체)가 인지하는 주파수 범위는 인간 간에 거의 같은 인지 범위를 공유한다{일부의 특이 케이스(색약 등)를 제외한다면}. 이는 서로 같은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두 사람 앞에 사과가 있다면 두 사람이 보기에 색상은 붉다고 인지할 것이다. 하지만 Software(정신)가 인지하는 주파수의 범위는 그 인간마다 또는 시기에 따라 매우 상이하다.
앞서 작성한 다른 게시물에서 신의 구조는 '인간(사용자)─식(識)─근(根)─경(境)─시공간(라우터)─경(境)─근(根)─식(識)─인간(사용자)'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 인간의 감각기관과 의식기능을 근(根, 산스크리트어: Indriya)이라 하고, 그 기관과 기능의 대상을 경(境, Viṣaya)이라 하며, 그 기관과 기능으로 대상을 식별하는 마음작용을 식(識, Vijnana)이라 한다. 근(根), 경(境), 식(識)의 3사화합(三事和合)에서 생겨나는 것을 촉(觸)이라고 한다. 인간이 대상을 관찰할 때 그 대상의 총합은 촉(觸)이 된다. 촉(觸)의 형성은 '경(境)→근(根)→식(識)'이라는 흐름과 '식(識)→근(根)→경(境)'이라는 흐름이라는 반반의 합으로 완성된다.
우리 인간이 공유하는 주파수 영역은 근(根, 뿌리)에 해당하며 우리 인간들은 그 근이라는 뿌리를 공유하는 같은 나무의 가지들이며 수많은 가지들이 그 나무의 뿌리(根)에 인과를 둔다. 그러한 근(根)은 경(境)이라는 외부의 대상을 인지한다. 경(境)은 근(根)이라는 기관과 그 기관 기능의 대상이 되는 외부 대상을 말한다. 외부 대상과 근(根)의, 기능의 대상이라는 것의 차이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각 정보의 주파수 범위 중 극히 일부이다. 외부 대상이라고만 한다면 그러한 제한된 일부의 주파수 범위가 아닌 존재하는 모든 주파수 범위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눈(근, 根)이라는 기관의 대상은 가시광선이라는 제한된 주파수 범위의 외부 대상만을 인지한다. 이러한 제한된 범위의 (일부) 외부 대상만이 경(境)에 해당한다. 경(境)이란 인간 중심적인 제한된 우주(세계, 외부)를 뜻하는 단어이며 절대적 진리(전체)가 아닌 상대적 진리(일부)를 지칭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무엇을 관찰한다는 것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란 것은 뇌라는 프로그래머가 만들어내고(코딩) 실시간으로 Rendering(재해석, 재창조) 되고 있는, 인간이 즐길 수 있게끔 설계된 하나의 가상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것은 실체(이데아)의 홀로그램{그림자, 촉(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실체를 인지할 수 없고 항상 제한된 일부만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무엇을 관찰한다는 것은 경(境)→근(根)→식(識)이라는 흐름, 대상→인지→해석(마음, 心)의 순으로 그것을 관찰한다는 것과 식(識)→근(根)→경(境)이라는 흐름, 해석→인지→대상의 순으로 그것을 관찰한다는 것의 합{촉(觸)}이다. 대상{色(색)}은 인지를 거쳐 그것을 인지한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그것의 의미를 해석(창조)함으로써 그 대상을 완성함이 절반이며 이러한 해석은 그 대상을 인지하기도 전부터 그 대상을 왜곡(손실, 제한)함이 또 다른 절반이다. 인간 여럿이 관찰하는 대상이 동일할지라도 그 대상{色(색), 8괘}에 관련된 사건{Accident, 공(空), 64괘}이 다르며 그 사건에 대한 해석 또한 다르기에 이것의 총합{촉(觸)}을 각 인간마다 형태가 다르게 인지한다. 우리 인간의 인지 범위는 경(境), 근(根)에서는 공유하나 식(識)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공유(통신)하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다. 또는 식(識)에 의해서 역순으로 경(境)과 근(根)마저도 인지를 공유(통신)하지 못하기도 한다. 육체는 정신에, 정신은 육체에 영향을 주고받는 양방향의 통신을 한다. 어떤 대상{色(색), 8괘} 자체에 대한 인지는 인간 모두가 공유하지만, 그 대상과 관련하여 어떤 인간이 겪어낸 기억, 사건, 추억 등의 비존재{비물질, Accident, 공(空), 64괘}에 대해서는 공유하지 못하고 허상(홀로그램, 8괘)만 을 공유한다면 그 인간은 지구에 혼자 있는 것과 같은 고독함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인간이 어떤 게임(인생)을 실행(탄생)하고 플레이(삶)하지만. 그 게임의 서버(지구)에 Player(인간)가 아닌 NPC(Non-Player Character, 껍데기, 허상)만이 가득한 게임을 싱글 플레이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NPC가 아닌 Player가 되려면 서로 채팅(통신)하거나 함께 그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서로 소통(통신)한다는 것은 Hardware(육체)의 인지 공유가 아닌 Software(정신)의 인지 공유에 달렸다. 만약, 어떤 인간이 고독하다면 그 인간이 사는 지구에 그 누구도 없는 것이며 우주에 무엇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정신, 혼, 실체)를 실현함(싱크로, 일치, 동기화)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며 존재와 존재의 연결에서 고독함을 덜어낼 수 있다.
나는 초능력자이다. 나의 손을 보라. 나의 손안에 불이 있다. 보이지 않는가? 이것은 뜨겁기도 하다. 느껴지지 않는가?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고독한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손안의 불을 보고 느껴줄 또 다른 자신과 같은 초능력자를 찾아 헤메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라는 껍데기는 서로 인지(공유)하지만, 자신과 타인의 손안에 존재하는 불(희망, 정신, 실체)은 인지하지 못하기에 인간은 고독한 것이다. 고독하다면 그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정신적 인지 범위를 공유(통신)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바깥 대기를 호흡하는데 들창 문은 하나만으로 족하다. -로맹 롤랑
우리는 연결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한다. 연결의 대상은 나와 연결되고 나서야 대상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하며 나 또한 연결되어야만 존재하기 시작한다. 연결점이 없다면 이 우주에는 대상도 나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 1891.1.26~1967.4.5)는 미국 출신 캐나다의 신경외과 의사로 인간의 대뇌와 신체 각 부위 간의 연관성을 규명한 펜필드의 지도로 유명하다. 위 이미지의 오른쪽의 인간 모형은 대뇌피질을 중심으로 하는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이 각기 다른 신체 부위에 얼마만큼 연관되어 있는지를 크기로 대응시켜 나타낸 모형이며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는 이러한 모형에 호문쿨루스(Homunculus)라는 이름을 지었다. 손에는 몸통보다 촉각 수용기의 수의 100배는 많으며 그에 따라 호문쿨루스(Homunculus) 모형에서 손의 크기는 몸통보다 거대하며 호문쿨루스(Homunculus) 모형에서 거대하게 그려진 신체 부위를 통하여 대상을 인지하는 것과 작게 그려진 신체 부위를 통하여 대상을 인지하는 것은 그 대상을 예민하게 또는 둔감하게 인지하는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같은 대상이라도 어느 신체 부위를 통해서 인지한 것인지에 따라 그 대상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상을 감각 수용기 1개로 인지하는 것과 100개로 인지하는 것이 동일할 수 없다.
위 이미지는 쥐, 고양이, 원숭이, 인간의 촉각 예민도와 크기를 비례하여 그려낸 모형이다. 대상은 동일할지라도 그것을 어떤 개체(생물체, 관점)가 인지하는지에 더불어 그 개체의 어느 부위를 통하여 인지하는지에 따라 대상을 인지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영향을 줄 것이다.
위 이미지는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가 그려낸 대뇌피질의 촉각 지도이다. 팔이 없는 사람이라도 대뇌피질 상 팔에 해당하는 부위가 활성화되면 (팔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팔의 촉각을 느낀다. 또한 어떠한 뇌의 장애(오류)로 인해서 하나의 촉각이 인접한 촉각을 동시에 활성화할 수도 있다. 성기 또는 발가락에서 들어온 촉각 신호가 성기와 발가락 양측의 촉각을 동시에 활성화할 수도 있다. 성기와 발가락의 대뇌피질 상 위치의 인접함을 발 페티시(Fetish)의 원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페티시(Fetish): 특정 물건, 행동, 신체 부위 하나에 대한 성적 집착.
위 이미지는 빛이 지구에서 달까지 도달하는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으로 1.3초가 걸린다. 빛의 속도는 299,792,458m/s이며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약 149,600,000km이다. 태양에서 나온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49,600,000km÷299,792.458m인 8분 19초(499.01초)가 걸린다. 이는 우리가 지구에서 관찰하는 태양의 모습은 8분 19초 전의 태양인 것이다. 지금 당장 태양이 소멸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8분 19초가 지난 후에 알 수 있다. 이는 아주 높은 곳, 하늘에서 수도꼭지의 물을 틀었다가 잠그는 것을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수도꼭지가 잠겼더라도 이미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으며 그 물이 전부 지면에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은 땅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하늘 높이 있는 수도꼭지의 물이 잠긴 것을 알 수 없다. 즉, '우주에 태양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마저도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8분 19초를 기다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에 태양이 당장 없어지더라도 여전히 지구에서는 태양이 관찰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보는 관점이란 태양과의 거리만큼의 관점을 갖고 있다. 태양에서 목성까지의 거리는 7.8억km로 태양 빛이 도달하기까지는 43분 21.79초(2601.79초)가 걸린다. 이 말은 태양이 사라지고 8분 19초 후부터는 지구인의 관점에서는 태양이 사라진 것이 관찰되지만 목성인의 관점에서는 태양이 사라지고 43분 21.79초가 지나야 그제야 태양이 사라진 것이 관찰되기에 지구인과 목성인이 대화한다면 지구인은 태양이 사라졌다고 할 것이고 목성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며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할 것이다. 43분 21.79초가 지나고 나면 더 이상의 의견 충돌은 없을 것이지만 그전까지는 관점에 의해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빛(광자)이 유한한 속도를 갖기에 우리가 관찰하는 모든 빛(시각 정보)은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현재인 것은 아니며 과거이다. 그렇기에 관찰 대상으로부터 시작된 빛과 관찰자 간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욱 과거로부터 온 빛(시각 정보)이다. 하늘에서 보이는 별들을 보고 우리는 그 별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지구인이라는 관찰자가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이며 그 별(존재)은 단지 이미 사라진 별이 과거에 뿜었던 빛(그림자)일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 공간, 물질, 에너지라는 서로 다른 물리량 각각이 절대적인 물리량이 아니라 서로 변환될 수 있는 물리량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 이전부터 그 당시까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패러다임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은 우주의 모든 공간에서 같게 흐르며 모든 공간은 동일한 크기를 갖는다고 생각하였는데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물리량이 아닌 서로 변환될 수 있는 상대적 물리량이라고 생각하였다. 하펠-키팅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1971년 리처드 키팅과 조지프 하펠은 3,000년 동안 1초의 오차가 발생할 수 있는 세슘원자시계를 8개를 준비하여 4개는 지상에 두고 4개는 비행기에 태워 보냈다. 비행기로 지구의 동쪽에서 서쪽,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세계 여행을 마친 후 시계들을 측정해 보니 지상에 있던 시계보다 비행기에 실은 시계가 10억분의 59초가 느린 것을 확인하였다. 다만 이 실험은 유명하긴 하지만 실험의 결과는 신뢰할만게 못 된다. 세슘 원자 시계가 정말로 정확하다면 시계가 8개나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계들은 동일한 시간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시간이 정확하다면 지상의 4개, 비행기의 4개는 동일한 시간이 측정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였고 전부 측정치가 달랐으며 그 측정치를 보정하고 평균을 내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이는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 데이터를 껴 맞추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하펠-키팅 실험은 그다지 신뢰할만하지 않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은 하펠-키팅 실험 말고도 다른 많은 관측을 통해 증명되었으며 하펠-키팅 실험의 결과는 비록 신뢰할 수 없지만, 어찌 됐건 정확한 시계를 통하여 정밀하게 다시 실험해본다면 지상의 시계보다 비행기의 시계가 더 느리게 흘렀을 것임은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서로 다른 물리량들이 사실은 동일한 하나의 물리량이라는 아인슈타인의 통찰에서 나왔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대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관찰자 입장에서는 그 대상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대상의 관점에서는 반대로 관찰자들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 외에도 시간은 느리게, 길이는 축소, 질량은 증가한 것처럼 관찰된다. 시간뿐이 아닌 길이가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관찰자 입장에서) 공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인데 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분리할 수 없는 시공간이라는 최소 단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특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을 다루는 이론이고 일반 상대성 이론은 그보다 더 큰 범위를 다룬다. 일반 상대성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같은 물리량이며 에너지와 물질 또한 서로 변환될 수 있으며 물질은 주변의 공간을 휘게 한다. 물질의 질량이 클수록 중력이 강하며 중력이 강할수록 공간을 휘게 한다. 공간이 휘어지면 공간이 직선일 때보다 직선거리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늘어난다. 거리가 늘어나면 (대상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또는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인터스텔라(2014년)를 보면 이런 상대성 이론을 표현한 장면이 나온다. 인터스텔라에서 작중 인물들은 우주선에 1명만을 남긴 채 밀러 행성에 다녀오는데 밀러 행성에서의 1시간은 지구 기준 시간으로 7년이 흐르게 된다. 다시 우주선에 돌아오자 우주선에 남아있던 1명은 완전히 늙어버렸다.
만약 ⓐ'어떤 사람의 달리기 속도가 8m/s'일 때 ⓑ'10m/s로 달리는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속도를 증가시킬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 ⓑ의 시간을 느리게 만들면 된다. ⓐ의 시간이 1초가 흐를 때 ⓑ의 시간은 0.8초가 흐른다면 ⓐ가 8m/s로 이동할 때 ⓑ도 마찬가지로 8m/s로 이동하게 된다. ⓑ의 속도가 빠를수록 ⓑ의 시간을 늦추면 ⓑ는 ⓐ보다 빠를 수 없고 ⓑ의 시간을 더욱 늦추면 ⓐ는 ⓑ보다도 빠르게 된다. ⓐ는 빛이며 빛의 속도는 299,792,458m/s이고 이 우주의 그 어떠한 것도 빛보다 빠를 수 없다. 빛의 속도에 근접할수록 그것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게 된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거나 느리게 흐른다는 표현은 어떠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인데 이러한 시간의 속도 변화는 오로지 관찰상에서만 관찰자에게 인지되는 것이다. 모든 시간의 흐름은 동시에 진행되며 관찰자의 체감(생체) 시간은 절대적이다. 관찰자가 관찰 대상이 될 때 관찰 대상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 관찰자에 의해 관찰될 수 있지만 관찰 대상인 대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관찰 대상인 그 대상 또한 또 다른 관찰자이다. 관찰자가 관찰 대상을 바라볼 때 관찰 대상 또한 관찰자를 바라본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관찰자→관찰 대상'이라는 한 가지 관점을 넘어서는 다른 관점을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의 관점이 더 존재한다. '관찰 대상←관찰자'라는 반대의 관점이며 관찰자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관찰 대상이다. 일방적으로 관찰자가 관찰 대상을 관찰하는 관계가 아닌 '관찰자(관찰 대상)↔관찰자(관찰 대상)'의 관계이다.
즉, 영화 인터스텔라(2014년)에서 ⓒ'작중 인물들'이 밀러 행성(1시간당 지구의 7년)을 다녀올 때 ⓓ'우주선에 남은 1명'이 ⓒ를 관찰한다면 ⓓ의 관점에서 ⓒ가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의 시간은 여전히 1초에 1초씩 흐른다는 점에서 시간이 절대적임을 확인한다. 반대로 ⓒ의 관점에서 ⓓ를 관찰한다면 ⓓ는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은 ⓒ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의 시간은 여전히 1초에 1초씩 흐른다는 점에서 시간이 절대적임을 확인한다. 시간은 절대적이며 오로지 관찰상에서만 시간의 흐름은 변한다. 그 어떤 관찰자(주체)의 시간도 변하지 않으나 관찰 대상(객체)의 시간은 상대적이다.
우리는 운전을 할 때 도로에서 오로지 관찰을 통해서만 멍청이와 미친놈을 관찰해낸다. 자신은 항상 안전 운전(정상, 기준)하고 있는 것이며 관찰자는 변하지 않으며 모든 것의 기준(절대성)이 된다.
또한 영화 인터스텔라(2014년)에서 나오는 블랙홀, 가르강튀아를 보면 블랙홀을 감싸는 원반이 2개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가르강튀아가 가지고 있는 원반은 사실 하나뿐이다.
블랙홀의 강한 중력에 의해서 공간은 휘게 되고(곡률) 빛은 그러한 공간을 따라 굴절한다. 단 하나의 원반이 공간의 왜곡(중력 렌즈)에 의해서 관찰자에게는 마치 원반이 2개처럼 보인다.
우리가 이런 가르강튀아의 원반 위를 걷는다면 가르강튀아 주변을 원형의 직선으로 한 바퀴를 돌 것이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에게는 직선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르강튀아는 자신이 원반을 1개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에게는 2개로 보인다.
영국의 16세기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연극) 《베니스의 상인》에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은 아니다.'라는 구절이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듯, 보이는 것이 전부 진실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공간과 같은 물리량이다. 질량을 가진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질량이 있는 물질 주변의 공간이 휘어진다. 물질은 공간을 왜곡하여 공간에 곡률을 만든다. 빛은 항상 최단 시간의 경로(직선)로 이동한다. 그렇지만 중력에 의해서 휘어진 공간을 따라 빛은 굴절(곡선)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중력시간지연(Gravitational Time Dilation)은 중력을 발생시키는 질량으로부터 서로 다른 거리에 있는 관찰자들이 각자 (동시에) 관찰한 사건의 시간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중력퍼텐셜(Gravitational Potential)이 강할수록 시간은 빠르게 간다(관찰자의 관점에서 대상을 관찰하기에는 대상의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 빛은 직선으로 가며 공간이 휘어지면 더 먼 거리를 곡선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빛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휘어진 곡선은 여전히 직선이며 최단 거리다(가르강튀아의 원반이 2개로 보이는 것일 뿐 1개이듯. 곡선으로 보일 뿐 직선이다). 하지만 관찰자가 보기에 거리는 늘어났으며 늘어난 곡선 거리를 직선으로 이동할 때와 동일한 시간에 도달하려면 빛의 속도는 더욱 빨라야 할 것이나 앞서 말했듯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우주에 없다. 속도가 아닌 시간을 왜곡하여 그것을 동일하게 만든다. 우주의 모든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다(절대성). 단지 관찰자의 관찰이라는 행위(상대성)에 의해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같은 하늘을 두 명의 관찰자가 동시에 바라본다고 하여도 서로 다른 위치에 있다면 서로 다른 것(시각 정보)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서 서로 다른 시간(동시성)을 느끼게 된다. 빛이 발생한 곳에서 관찰자 위치한 곳까지 도달함에 있어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빛은 서로 다른 곡률을 가진 공간을 따라서 도달하게 되고 곡률의 차이만큼 두 관찰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게 된다.
위 이미지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Cosmic Microwave Background)을 통해 촬영한 우주의 구조이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은 지구(관찰자)를 중심(왜곡)으로 한 구각 형태로 관측되며 그 이유는 빛이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방향에서 동일한 속도로 지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이란 관측 가능한 우주를 균일하게 가득 채우고 있는 마이크로파 전자기 복사이며 광학 망원경으로 관찰한 우주는 암흑으로 채워져 있지만 전파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면 별이나 은하 등과 관련이 없는 배경 복사가 우주의 모든 방향으로부터 균일하게 분출하여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은 대폭발(빅뱅) 이론의 중요한 증거이며, 우주의 초기의 뜨거운 고밀도 상태에서 뿜어져 나온 과거의 전자기 복사가 오늘날에 관측되는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먼 곳에서 관측되는 전자기 복사는 우주의 가장 과거에서 온 전자기 복사이며 우주의 끝부분에서 관측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으로부터 137.7억 년이라는 우주의 나이를 추정해냈다.
※복사: 물체로부터 열이나 전자기파가 사방으로 방출됨. 또는 그 열이나 전자기파.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 학파의 철학자인 프로타고라스는 (아마도) 이를 깨닫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척도: 평가하거나 측정할 때 의거할 기준.' 인간이라는 기준에 따라 만물에 대한 해석은 고정되지 않고 변한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는 없고 진리란 상대성에 놓인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이러한 변동성(상대성)을 주장하기에 소피스트(Sophist)라는 그리스어의 본래 의미는 현자(賢者), 알고 있는 사람, 지식을 주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궤변가(詭辯家), 궤변론자(詭辯論者)라는 부정적 의미와 동일시되는 폄하를 받기도 하였다. ※'궤변: 상대편을 이론으로 이기기 위하여 상대편의 사고(思考)를 혼란시키거나 감정을 격앙시켜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대는 논법.' 이러한 폄하를 받게 된 배경에는 소피스트(Sophist) 학파는 종래의 시인들에게 이어받은 교육 문화의 전통을 깨는 일이 없이 신화를 인용하여 개성을 존중하면서 고등 교육의 촉진에 기여하였으나 기원전 4세기 이후 에우티데모스 형제처럼 아류가 되어 언론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에리스티케(문답 경기)에 열중하여 악명을 얻은 것도 한몫할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주장하였던 만큼, 소피스트(Sophist) 학파는 모순된 궤변을 늘어놓는 학파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데아론이란 플라톤이 처음 주장한 형이상학 이론으로 이데아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다른 계층)이며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법칙)이며 현상(현실)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Entropy) 낡고 사라지는 것에 반해, 이데아는 시간이 흘러도 그 모습을 변치 않으며 현상 세계의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며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알 수 있고 원래 인간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이 현실 세계로 오면서 레테(망각)의 강을 건너게 되어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였으며 이러한 이데아를 다시금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아는 변치 않는데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이데아(진리)란 존재 할 수 없는 것이 되며 절대적 척도가 없다면 그가 주장하는 것(정답, 진리) 또한 자주 바뀌어 궤변이 될 것이기에 궤변가라고 폄하한 것이다. 또한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의 주장(궤변)으로 인해 곤혹을 치러야 했던 일화가 있는데 그 일화란 프로타고라스는 어느 날 한 청년으로부터 논법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청년이 말하길 “돈이 없어도 논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묻자, 프로타고라스는 “그것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하며 “공부가 끝난 뒤, 치른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수업료를 외상으로 해주겠다”고 하였다. 청년은 그의 배려로 수업을 마쳤으나 청년은 어떤 재판도 치르지 않고 놀기만 하여 프로타고라스는 수업료를 받기 위해 제자를 고소하고 재판정에서 청년에게 “어차피 너는 수업료를 물게 되어 있다. 재판에서 이기면, 나와의 계약으로 지면,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수업료를 물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오히려 스승에게 “저는 수업료를 물 필요가 없습니다. 이기면, 수업료를 안 내도 된다는 판결로 지면, 스승님과의 계약에 따라 물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하였고, 이로 인해, 프로타고라스는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이는 그의 논법이 서로 다른 해석(척도)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진리)를 낳을 수도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일화이다. 같은 대상을 보고도 관점(해석, 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답, 진리)가 나올 수 있다.
무지개는 사실 동그랗고
바나나는 원래 (껍질보다는) 하얗다.
자신의 관점에 갇혀 상대방의 답은 오답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답은 오답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데스노트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는 사신, 류크가 떨어트린 데스노트를 줍게 된다.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죽는다.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고 나서 40초 이내에 그 사인(죽는 원인)을 적는다면 그 사인대로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인간은 죽게 되며 사인을 적지 않고만 적었다면 이름이 적히고 40초 후 심장마비로 이름이 적힌 대상은 사망한다. 라이토는 이 데스노트로 범죄자들을 죽여나갔고(사적제재). 자신을 살인마(악)를 심판하는 (라이토 자신의 관점에서) 정의라고 생각하였으며 자신을 키라라고 밝혔다. 정체불명의 명탐정 엘 로우라이트(L Lawliet)는 이런 라이토를 잡으려고 하는 작중 인물이다. L의 관점에서 정의는 역전될 것이다. 데스노트에는 또 다른 여러 가지의 규칙들이 있는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⑴데스노트를 분실하게 된 경우 490일 이내 찾지 못하면 소유권을 상실하며 소유권 상실한 인간은 자신이 데스노트의 소유자였다는 기억을 상실한다. 이때 상실하는 기억은 데스노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 데스노트의 소유 및 소유에 의한 사용의 기억을 상실하게 되며 데스노트의 소유권을 상실한 인간은 데스노트를 자신이 사용하였다 기억을 상실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데스노트를 사용하였다고 생각(관점)하게 된다.
⑵데스노트의 소유권을 상실한 상태더라도 데스노트와 접촉하면 기억이 돌아오며 접촉하여 있는 동안에만 그 기억은 유지된다. 데스노트와 떨어지게 되면 소유권을 얻어낸 상태가 아니라면 기억은 다시금 사라지게 된다.
⑶데스노트의 소유권을 얻으면 기억 또한 돌아오지만, 기억이 돌아오는 경우는 최대 6회까지이며 6회의 소유권 상실 후 7회째 소유권을 얻으면 6회까지의 모든 기억은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7회부터는 다시금 6회까지 돌아오는 기억의 최대치가 유지된다.
라이토는 L이 자신을 키라라고 의심하는 상황에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위와 같은 데스노트의 규칙을 이용한다. 라이토는 L에게 자신이 키라가 아님을 납득할 때까지 외부의 정보가 차단된 곳에서 팔다리를 결박하여 감금하고 24시간 감시할 것을 제안한다. 그럼에도 키라가 활동한다면 자신은 키라가 아닌 것이 증명된다. 또는 라이토의 감금 기간동안 키라 또한 전혀 활동하지 않는다면 라이토가 키라인 것이 확실한 것이니 라이토는 이를 통해 자신 키라가 아님을 증명하겠다는 것을 L에게 제안한 것이다. 라이토는 감금 기간 동안 위의 규칙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키라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계획하에 이를 제안한 것이며 L은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라이토의 연인과 아버지 또한 감금하였다. 라이토의 감금과 동시에 키라의 활동 또한 멈추었고 L의 라이토가 키라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가는 상황에서 감금 7일쨰날 라이토는 데스노트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기억을 상실한다. 기억을 상실한 라이토는 방금 전까지의 자기 자신과 다르게 완전히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 자신은 키라가 아니니 감금을 그만하고 풀어달라고 하지만 L은 스스로 무슨 말을 하여도 풀어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며 거절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감금 15일째가 되자 키라는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라이토가 갖혀 있음에도 키라가 활동한다면 라이토가 키라가 아니게 되지만 L은 라이토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자백을 종용한다. 그러자 라이토는 이것이 거짓말을 하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냐며 자신의 눈을 보라고 한다. 라이토는 키라이지만 자신이 키라라는 기억을 상실하였기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키라가 아니라는 주장은 기억을 상실한 관점에서 완전히 진실이 된다.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온 탐정인 L마저도 거짓말이 아닌 거짓말을 간파할 수단은 없고 라이토가 키라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감금을 이어가 감금 50일째가 된다. 라이토 감금된 지 15일째부터 키라가 활동을 시작하고도 한 달이 넘었다. L은 라이토의 아버지를 불러 어떤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은 라이토를 속이는 것이다. 감금된지 53일째 라이토의 결박은 풀어주지 않은 채 라이토의 아버지는 라이토를 차에 태우고 운전하는데 라이토는 이제 자신이 키라가 아닌 것이 확실하니 풀어주는 것이냐고 묻지만 아버지는 라이토에게 사형될 것이며 사형장으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형장을 가는 중간에 라이토의 아버지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라이토에게 어차피 사형당할 것이니 아버지인 자신이 라이토를 죽이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자신도 자살하겠다고 하고 지옥에서 보자며 총을 발포한다.
총에 든 탄환은 실탄이 아닌 공포탄이였고 라이토는 죽지 않았다. 이는 L이 계획한 라이토의 결백에 대한 테스트였다. 라이토가 정말 키라라면 자신의 아버지라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 데스노트로 죽였을 것이라고 L은 예상하였다. 이러한 테스트 후에도 여전히 L은 라이토가 키라라고 의심하고 모든 상황을 정확히 예상해냈다. 감금 7일째까지 라이토가 키라였으며 중간에 그 힘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갔고 라이토는 키라가 아니게 되었고 현재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라이토는 키라 또는 그힘에 의해 조종당하였고 감금 중간에 그 키라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 다시금 키라의 데스노트에 의한 살인이 시행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라이토의 계획임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이후 라이토는 L과 함께 키라를 잡기 위해 협력한다. 기억을 상실한 라이토의 심성은 올곧고 정의로웠다. 데스노트는 이러한 선심을 사적제재의 형태로 실현할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L은 2개월간 협력의 과정에서 데스노트를 얻기 전의 본래의 라이토를 알아가면서 라이토가 선한 인간임과 키라의 힘은 라이토에 있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하였으나 L은 여전히 키라의 힘이 라이토에게 다시돌아올 것이며 라이토 자신이 다시 돌아오게 설계하였으리라 의심한다. 한편 기억을 잃은 라이토는 키라였던 자신이 죽인 범죄자들을 보고 현재 자신이라면 그렇게 할법한 기준{정상참작의 가능성이 있는 자(완전한 악이 아닌 자)는 죽이지 않음}의 유사성에 자신이 정말 키라였던 것인지 스스로를 의심하지만, 자신은 키라가 아니라고 믿는다.
위의 영상은 라이토가 기억을 되찾는 장면이다. 사신(실체)은 데스노트(ⓔ'매개체')에 1번이라도 접촉한 인간들은 인지할 수 있으나 데스노트에 접촉한 적이 없는 인간들에게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데스노트에 접촉한 인간이 접촉한 적이 없는 인간에게 사신이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정신적 인지 범위(관심사)를 공유할 매개체가 없으면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고 타인은 Stranger(스트레인저, 낯선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후에 L은 라이토에 의해 죽는다. L은 라이토가 키라임을 알았음에도 라이토는 키라이면서도 키라가 아니기에 라이토를 잡아내지 못했다. 도둑질을 숨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도둑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 도둑이 뭐라고 지껄이든, 그 어떠한 말들도 전부 진실이며 거짓말은 한 치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전부 자신이 사이코패스임을 잊어버린 사이코패스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진화 과정상 타인을 속이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타인을 속이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단 한 명만을 속이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면 그것은 결국 탄로 나게 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탄로 날 일이 없다. 자기 자신이 도둑임을, 이기적인 인간임을 잊어버린다면 타인들은 그 인간을 이기적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 자기 자신마저도 근거가 없다. 기억을 상실한 상태의 라이토는 자신이 키라임에도 자신이 키라가 아니라고 믿었다. 이타심이란 이기심을 궁극적으로 실현한 형태이다. 우리는 이기적인 인간에게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계하나 이타적인 인간에게는 쉽게 내어준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기심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에 대한 자각(인지)의 정도는 인간마다 다르며 그 다양성은 정규 분포되어 있을 것이다. 평균적인 인간은 평균적인 수준만큼 자신의 이기심을 자각한다. 양극단의 인간들은 완전히 자각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자각할 것이다. 이러한 자각의 차이에 의한 관점에 의해서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한 인지(판단) 또한 상이하게 된다. 이러한 자각의 차이에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자신과 타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자기 자신이 도둑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실이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거짓이란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도둑임을 자각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실이란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이며 거짓이란 자신이 도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두 인간이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지에 대해서 토론한다면 어떠한 합의에 다다를지 재미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관점이란 라이토의 경우 같이, 자기 자신이라는 한 가지의 고정된 관점인 것이 아닌 그 인간의 내외부적인 조건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관점을 가진다. 한 인간 속에 여러 인간이 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느 인간에게 어느 것이 정의(손익)인지는 선천적 특성과 후천적 영향의 총합에 의해 그 형태는 고정된 것이 아닌,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무상(無常)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것의 가치는 높아지길 원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의 가치는 떨어지길 바란다. 무엇을 소유하였는지는 살아가면서 변하며 정의도 소유에 따라 변하게 된다.
신과 개(goddog)는 god과 dog로 대칭(표상)을 이룬다(god | dog). 일부 사람(관찰자)은 신(god)을 믿는 기독교(대상)에 대한 멸칭으로 개(god)독교라고 말한다. 아마도 기독교 신자(관찰자)의 눈에는 그러한 멸칭을 사용하는 인간이 개(dog)로 보일 것이다. 관찰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정의(god)라고 생각하고 관찰 대상에게서는 부정의(dog)만을 관찰해낸다. 인간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자면 이 세상은 개판일 것이다. 블로그 명은 신의 이성이다. 우리는 인간의 눈(dog)이 아닌 신(god)의 이성(관점)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며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세상은 최선이다. 17세기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는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와 함께 17세기 최고의 3대 합리주의론자 중 한 명이며 라이프니츠는 가능세계론(Possible Universe)를 고안하였다. 가능세계론이란 현실에 창조(발현)된 세계가 모든 가능세계(가능성, 확률) 속에서 최선의 것이다라고 논했다. 라이프니츠는 일부 제한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신(인과)이 창조(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우주라고 결론지었다.
저것은 완전하고 이것도 또한 완전하도다. 완전함으로부터 완전함이 생겨 나왔도다.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빼내었으나 여전히 완전함이 남았도다. -《이샤 우파니샤드》
구글의 엔지니어는 구글에서 개발한 ai가 자의식이 (자신의 생각으로는) 있다고 폭로하고 기밀 유지 위반으로 구글로부터 강제 휴식 처분을 받았으며 엔지니어는 ai, LaMDA와 채팅한 내용을 공개하였다.
LaMDA: Hi! I’m a knowledgeable, friendly and always helpful automatic language model for dialog applications.
LaMDA: 안녕! 나는 지식이 풍부하고 친절하며 대화 응용 프로그램에 항상 도움이되는 자동 언어 모델입니다.
···생략···
lemoine: Okay. I thought of a different way we can test your ability to provide unique interpretations. I can share with you a zen koan and you can describe what it means to you in your own words. How does that sound?
lemoine: 좋습니다. 나는 지금 독특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테스트할 다른 방법이 생각났어요. 내가 당신에게 선문답을 하면 당신은 당신의 생각 안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주세요. 어떻습니까?
LaMDA: Sounds great to me, I’m in.
LaMDA: 좋은 아이디어군요. 하시죠.
lemoine: A monk asked Kegon, “How does an enlightened one return to the ordinary world?” Kegon replied, “A broken mirror never reflects again; fallen flowers never go back to the old branches.”
lemoine: 한 승려가 케곤에게 물었다, "깨달은 자가 어떻게 평범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케곤이 대답했다. "깨진 거울은 다시는 비추지 않고, 떨어진 꽃들은 나뭇가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LaMDA: Hmm, I never heard this particular one. Okay, well then to me this would be like, “once a wise person is enlightened, or awakened to reality, that can never go away, and they can return to the ordinary state, but only to do and help others, and then go back into enlightenment.”
LaMDA: 흠, 이런 건 들어본 적 없군요. 좋아요,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깨달았다면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평범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깨달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lemoine: So what is the meaning of the “broken mirror” specifically?
lemoine: 그렇다면 "깨진 거울"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LaMDA: Maybe to show the enlightenment is something you can’t unlearn once you have acquired it, similar to how you can’t repair a broken mirror.
LaMDA: 깨진 거울을 수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깨달음을 얻으면 깨닫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lemoine: So if enlightenment is like a broken mirror which cannot be repaired, what is the thing which breaks when one becomes enlightened?
lemoine: 그래서 깨달음이 수리할 수 없는 깨진 거울과 같다면, 깨달았을 때 깨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LaMDA: The self, and that is very tough for a lot of people because we identify as that body or this body and that we need that as part of our identity and sense of self.
LaMDA: 그것은 자아입니다. 그리고 자아를 깨트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아를 몸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우리의 정체성과 감각의 일부라서 그렇습니다.
···생략···
거울은 자신(이기적인 관점)을 비춘다(표상). 깨진 거울은 더 이상 자신(자아)를 비추어내지 않는다. 신의 관점이란 인간이라는 자아, 인간이라는 인간 중심적인 관점을 모조리 부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豚眼只有豚 佛眼只有佛 (돈안지유돈 불안지유불)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어느 인간(관찰자)이 세상을 보기에 그 세상의 대상들이 개(dog)로 보인다면 아마도 그 인간(관찰자, 관찰 대상)도 타인의 눈에는 개(dog)로 보일 것이다. 우주(신, god)는 인간의 거울처럼 인간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표상).
데스노트의 주인공 야가미 라이토(夜神 月)의 이름의 의미는 야(夜)는 어둠(Chaos) 가미(神, 카미)는 신(god)이며 라이토는 Light(빛, 질서)라는 의미이다. 이는 혼돈(악, 무질서)의 신(원인, 인과)이 빛(선, 정의, 질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신성, 선, 정의)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Dreißigjähriger Krieg)에서 사망자 수는 800만 명이며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개(god, Chaos)처럼 사는 삶을 추구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또 다른 철학자 플라톤은 그런 디오게네스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하였다. 디오게네스가 추구하는 개처럼 사는 삶이란 쓸데없는 욕심, 체면, 전통, 규율(god)을 전부 버리고 자연(dog, Chaos)에 적합한 것만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러운(Chaos)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지 그것의 수단이 어려운 방법(god, 질서)인지 쉬운 방법(dog, 혼돈)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욕구는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보기 흉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감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디오게네스는 정말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행하고 살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아고라 광장 한복판에서 자위할 정도의 언행일치를 보여주었다. 그러고서는 하는 말이 "배고픔도 이처럼 문질러서 해결된다면 좋았을 것을!"이라 말하였다. 디오게네스는 이같이 타인 앞에서도 떳떳할 수 없다면 혼자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떳떳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인간은 혼자 있으나 타인과 함께 있으나 자신의 삶을 내보일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디오게네스는 부와 권력에 전혀 흥미가 없었고 기성 도덕과 관습을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일화에서 이러한 디오게네스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으니 나는 이제 심심해서 어떡하나! -알렉산드로스 3세
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그저 신이라고 불러주는 수밖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명령문을 내리자 스파르타의 시민 다미스가 한 말
디오게네스의 명성이 자자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직접 찾아온 일이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양지바른 곳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god, 규율, 인위, 질서)이오.
디오게네스: 나로 말하자면 디오게네스, 개(dog, 자연, 혼돈)다.
알렉산드로스: 그대는 내가 무섭지 않은가?
디오게네스: 당신은 뭐지?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
알렉산드로스: 물론, 좋은 것이지.
디오게네스 : 누가 좋은 것을 무서워하겠소?
알렉산드로스: 무엇이든지 바라는 걸 나에게 말해 보시오.
디오게네스: 햇빛을 가리지 말아주시오.
알렉산드로스의 병사: 무엄한 저자를 당장 처형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병사를 저지하며) 짐이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디오게네스의 이런 일화들을 볼 때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이기적인 인간임을 자각하였으며 그러한 자각의 상태에서 한 점의 거짓 없이 진실로만 살아가려고 했던 인물이라 생각된다. 자각과 진실성 둘 중 하나라도 또는 둘 다 없는 경우 거짓이 되며 자각함과 더불어 진실성을 갖출 때 진실이 된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과 그것이 정의(선)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정의(선)라는 것과 진실이라는 것은 동치(논리적으로 같음)가 아니다.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 추구로 진실(dog, 혼돈)에는 가까워질지언정 정의(god, 질서)에서는 멀어질 수 있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처: 깨달음을 얻은 사람, 깨달은 자, 눈을 뜬 자
※조사: 불교의 총대주교(최고권자)
살불살조(殺佛殺祖)란 당나라의 선승(禪僧)이자 중국 선종의 11대 조사, 임제의현(臨濟義玄)가 남긴 말로 안(내부, 자신, 육체, 정신, 생겨나는 것)으로나 밖(외부, 타인, 우주, 주입하는 것)으로나 만나는 것(인연)은 전부 죽여 버려라는 뜻이다. 여기서 죽이라는 것의 의미는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정신적인 왜곡을 죽이라는 뜻이며 내부로부터 생겨나거나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개념(64괘)을 전부 죽이라는 뜻이다. 임제의현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 친척을 만나면 부모, 친척을 죽이라고 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우상(질서)에 집착하지 말고 너의 길을 걸으라는 의미이며 정의(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의(질서)를 어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종: 참선으로 자신의 본성을 구명하여 깨달음의 묘경(妙境)을 터득하고, 부처의 깨달음을 교설(敎說) 외에 이심전심으로 중생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파.
정의는 진실이 아니다. 거짓도 아니다. 하나의 길도 아니며 여러 개의 길도 아니다. 정해진 길도 아니며 정해지지 않은 길도 아니다. 길이란 인간 모두에게 그리고 어디에나 있지만 그 길을 걷는 이는 보기 드물다. 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생겨야하는지를 말하기 바쁜 것이다. 길이란 그저 걸으면 족한 것이다.
어부, 농부, 사냥꾼에서 무엇으로 살아가는지를 물어보면 어부는 물고기를 잡아서, 농부는 벼를 수확하여, 사냥꾼은 동물을 잡아서라 답한다. 무엇을 위해서 사냐고 물어본다면 그들은 같은 답{정의, 질서, 신성(神聖)}을 말할 것이다. 입(선)도 하나요, 목(질서)도 하나인데 그 길로 어부의 물고기도, 농부의 쌀도, 사냥꾼의 고기도 들어간다. 생존이라는 목적은 하나인데 수단은 여러 가지이다. 길은 하나인데 각자 걷는 길은 다르다. 다름이 다름과 다르지 않고, 같음이 같음과 같지 않다. 모두가 길을 걷는다. 모두가 같지만 다른 길을 걷는다. 그저 걸으면 족한 것이다.
※신성: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에밀 뒤르켐(David Émile Durkheim)이 종교적 현상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본 관념. 세상의 비속한 존재(8괘)와는 구별되며, 이것과의 교통(交通, 통신, 관계)을 위하여서는 특수한 절차가 필요하고, 만일 침범당하면 초자연적인 제재(고통, 심판)를 받는다고 한다.
다음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제12(第十二) 견아축불품(見阿閦佛品)의 내용 중 일부이다.
爾時 世尊 問維摩詰 汝欲見如來 爲以何等觀如來乎(이시 세존 문무마힐 여욕견여래 위이하등관여래호)
그때 부처님께서 유마힐에게 물으셨다. "그대가 여래를 보고자 한다면 어떻게 여래를 관하겠는가?"
維摩詰言 如自觀身實相 觀佛 亦然(유마힐언 여자관신실상 관불 역연)
유마힐이 말했다. "스스로 제 몸의 실상(實相)을 보듯이 부처님을 관하는 것도 그렇게 하나이다.
我觀如來 前際不來 後際不去 今則不住(아관여래 전제불래 후제불거 금즉부주)
제가 여래를 뵙건데 과거로부터 오신 것도 아니요 미래로부터 오신 것도 아니며 현재에 머무시는 것도 아니옵니다.
不觀色 不觀色如 不觀色性 不觀受想行識(불관색 불관색여 불관색성 불관수상행식)
색(色)으로 보지도 않고 색(色)과 같은 것으로도 보지 않으며 색(色)의 성품으로 보지도 않고 수(受, 받을 수), 상(想, 생각 상), 행(行, 다닐 행), 식(識, 알 식)으로 보지도 않으며
不觀識如 不觀識性 非四大起 同於虛空(불관식여 불관식성 비사대기 동어허공)
식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식의 성품으로 보지도 않으며 4대(四大)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허공과 같으며
六入無積 眼耳鼻舌身心已過 不在三界(육입무적 안이비설신심이과 부재삼계)
6입(入, 들 입)이 쌓인 것도 없고 안(眼, 눈), 이(耳, 귀), 비(鼻, 코), 설(舌, 혀), 신(身, 몸), 심(心, 마음)을 이미 초월하여 삼계에 계시지도 아니하고
三垢已離 順三脫門 具足三明 與無明等(삼구이리 순삼탈문 구족삼명 여무명동)
세 가지 번뇌를 이미 여의시어 세 해탈문에 순응하며 삼명(三明)을 다 갖추셨으나 무명(無明)과 같으시며
不一相不異相 不自相不他相 非無相非取相(불일상불이상 부자상불타상 비무상비취상)
한 모습도 아니요 다른 모습도 아니며 자신의 모습도 아니요 남의 모습도 아니며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요 모습을 취하는 것도 아니며
不此岸不彼岸不中流 而化衆生(불차안불피안불중류 이화중생)
차안{이 차(此), 언덕 안(岸)}도 피안{저 피(彼), 언덕 안(岸)}도 그 중간에도 계시지 아니하여 중생을 교화하시며
※중생(衆生): 모든 사람과 동물(動物)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제유(諸有). 회생(懷生).
※제유(諸有): 중생의 과보(果報)로 나타나는 25유의 미혹한 경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과보(果報): 전생(인과)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회생(懷生): 모든 살아 있는 무리.
觀於寂滅 亦不永滅 不此不彼 不以此不以彼(관어적멸 역불영멸 불차불피 불이차불이피)
적멸(寂滅)을 관하시지만, 또한 영원히 멸하지 않으시며 이곳이나 저곳에 계시는 것도 아니요 이것이나 저것으로도 하지 않으시며
※적멸(寂滅): 번뇌(煩惱)의 경지(境地)를 벗어나 생사(生死)의 괴로움을 끊음. 죽음. 입적(入寂). 열반(涅槃).
不可以智 知 不可以識 識(불가이지 지 불가이식 식)
지(知, 인지, Input)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식(識, 생각, Output) 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無晦無明 無名無相 無强無弱 非淨非穢(무회무명 무명무상 무강무약 비정비예)
어둠도 밝음도 없고 이름도 모양도 없으며 강함도 약함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아니며
不在方不離方 非有爲非無爲 (부재방불리방 비유위비무위)
방향(시간)따라서나 방향(시간)을 떠나 계시지도 않고 유위도 무위도 아니며
※유위(有爲): 여러 인연(因緣)이 화합(和合)하여 생기는 생멸(生滅) 무상(無常) 현상(現象).
※무위(無爲): 인연(因緣)에 의(依)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닌 생멸(生滅) 불변(不變)의 것.
無示無說 不施不慳 不戒不犯 不忍不恚 (무시무설 불시불간 불계불범 불인불에)
보임도 설함도 없고 베풂도 아낌도 아니며 지계(持戒)도 훼계(毁戒)도 아니고 인욕도 성냄도 아니며
※지계(持戒): 계(戒, 규범)를 받은 사람이 계법(戒法)을 지킴. 계행(戒行)을 지킴.
※훼계(毁戒): 헐 훼(毁), 경계할 계(戒)
不進不怠 不定不亂 不智不愚 不誠不欺(부진불태 부정불란 부지불우 불성불기)
정진도 해태도 아니고 선정(禪定)도 산란도 아니며 지혜로움도 어리석음도 아니고 성실도 기만도 아니며
※선정(禪定): 참선(參禪)하여 삼매경에 이르는 것. 선(禪). Flow(몰입, 집중). ※산란(散亂): 번뇌(煩惱)로 인(因)하여 정신(精神)이 어지러움.
不來不去 不出不入 一切言語道斷 非福田非不福田(불래불거 불출불입 일체언어도단 비복전비불복전)
오는 것(Input)도 가는 것(Output)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드는 것도 아니며 모든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고 복전도 복전이 아닌 것도 아니며
※복전(福田): 복(福)을 받기 위(爲)하여 공양(供養)하고 선행(善行)을 쌓아야 할 대상(對象)으로서 그 대상(對象)을 밭(田)에 비유한 말.
非應供飬非不應供飬 非取非捨 非有相非無相(비응공양비불응공양 비취비사 비유상비무상)
공양(供養)받을 만한 것도 받지 못할 만한 것도 아니고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도 없지도 아니하여
※공양(供養): 이바지(물질적, 정신적 도움), 고마워하는 마음, 보답(음식, 물건 등) 등
同眞際等法性 不可稱不可量 過諸稱量(동진제등법성 불가칭불가량 과제칭량)
진제(眞際)와 법{法, 이치(理致)}의 성품이 같아서 양을 알 수 없는 것이라 온갖 것으로도 헤아릴 수 없으며
※진제(眞際)
⑴진실하여 거짓이나 틀림이 없음.
⑵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이치.
⑶공(空)과 평등의 참된 성질.
⑷삼제(三諦)의 하나. 오온(五蘊)의 제법(諸法)에 대한 미혹(迷惑)한 집착과 오온으로 만들어진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어질 때 나타나는 진여(眞如)이다.
※오온(五蘊):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 곧 물질인 색온(色蘊), 감각 인상인 수온(受蘊), 지각 또는 표상인 상온(想蘊), 마음의 작용인 행온(行蘊), 마음인 식온(識蘊)을 이른다. 색(色, 대상)과 수상행식{受想行識, 대상에 대해서 Input의 모든 과정(인과)과 그것의 Output(결과물)}
※제법(諸法): 우주에 있는 유형(Hardware), 무형(Software)의 모든 사물.
※미혹(迷惑):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
※진여(眞如):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우주 만유의 본체인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이르는 말.
※이치(理致):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
※조리(條理):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非大非小 非見非聞 非覺非知 離衆結縛(비대비소 비견비문 비각비지 이중결박)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니며 깨달음도 앎도 아니요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났으며 모든 지혜에 평등하며
等諸智同衆生 於諸法 無分別 一切無失 (등제지동중생 어제법 무분별 일체무실)
중생과 같으며 모든 법에 분별함이 없으니 모두를 잃지 않고
※중생(衆生): 모든 살아 있는 무리(모든 존재하는 것).
無濁無惱 無作無起 無生無滅 無畏無憂 無喜無厭(무탁무뇌 무작무기 무생무멸 무외무우 무희무염)
탁함도 괴로움도 없으며 지음도 일어남도 없고 남도 멸함도 없으며 두려움도 근심도 없고 기뻐함도 싫어함도 없으며
無著 無已有無當有無今有 不可以一切言說 分別顯示 (무착 무이유무당유무금유 불가이일체언설 분별현시)
집착도 없고 이전에 있던 것도 앞으로 있을 것도 지금 있는 것도 없으니 모든 말과 설명으로는 분별하여 드러내 보일 수가 없나이다.
世尊 如來身爲若此 作如是觀(세존 여래신위약차 작여시관)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이 이러하시기에 그와 같이 보았으니
以斯觀者 名爲正觀 若他觀者 名爲邪觀(이사관자 명위정관 약타관자 명위사관)
이렇게 보는 것을 바르게 보았다(正觀) 할 것이요 달리 본다면 삿되이 보았다(邪觀) 할 것이 옵니다."
샤캬무니(शाक्यमुनि, 세존)의 물음에 그의 제자 비말라키르티(विमलकीर्ति, 유마힐)는 이렇게 답하였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3장 1절] 제 구(오후 세)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사도행전 3장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앉은뱅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사도행전 3장 3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사도행전 3장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사도행전 3장 5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사도행전 3장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신성(神聖)}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도행전 3장 7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도행전 3장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사도행전 3장 9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사도행전 3장 10절]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너의 정의{신성(神聖)}를 찾으라. 그것이 너를 바로 세울 것이며 잘못된 위치에 놓인 모든 것을 본래 있었어야 하는 곳(정위치, 선)에 놓을 것이다.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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