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는 영리하고 교활한 인물이었고 여러 차례 신들을 기만하고 속였다. 어느 날 시지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교묘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을 끝내는 역할을 맡고 있는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가 시지프를 찾아왔을 때, 시지프는 타나토스에게 자기 목의 목걸이를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타나토스가 그 부탁을 들어주려고 하자 시지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나토스를 묶어서 구속하였고 자신의 집에 감금한다. 타나토스가 감금되어 있던 한동안 세상에서 죽는 사람은 없었고 신들은 당황하였다. 번개의 신 제우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타나토스를 구출하라고 명하였고 아레스는 타나토스를 구출하였다. 결국 시지프는 저승으로 끌려갔으나 아내에세 자신이 죽어도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부탁하였었고 황천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가서 제사를 지내주라고 부탁하고 돌아오겠다고 속이고 돌아오지 않자 하데스는 전령의 남신 헤르메스에게 시지프의 혼을 찾아 황천에 데리러 올 것을 명하고 시지프의 혼은 결국 황천에 끌려오게 된다. 신들을 여러 차례 기만한 죄로 제우스는 시지프에게 형벌을 내린다. 그 형벌이란 황천에서 바위를 언덕 위에 올려놓는 것이였고 시지프는 바위를 언덕의 정상에 올려놓는다. 정상에 올려놓자마자 바위는 언덕의 정상에서 굴러떨어졌다. 시지프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인해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끝 없이 언덕 위에 올려놓아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시지프의 형벌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인간이 바로 시지프의 환생이며 우리 인간은 시지프가 받은 그 형벌을 이어 받고 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바위를 만족이라는 언덕 위에 올려놓으려고 애쓰나 언덕 위에 바위를 올려놓자마자 바위가 떨어지듯 인간의 만족은 결코 채워지는 법이 없다.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른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만족은 쉽게 얻을 수도 없고 오래가지도 않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신들을 기만하고 신들의 분노를 산 죄로 인해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나 채운 만큼 비워진다. 또다시 채워야한다. 시지프가 떨어지는 바위를 끝 없이 언덕 위로 올려놓으려고 하듯이 말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1942년에 쓴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첫 문장을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철학적 문제란 인간이 시지프의 형벌을 죽을 때까지 해나가는 것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냐는 것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제1장 2절
알베르 카뮈는 또한 《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떠한 물음이 다른 어떠한 물음보다 더 절박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물음이 권고하는 행위들이 바로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대답하겠다. 존재론적 논거를 관철하기 위해 죽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갈릴레이는 중요한 과학적 진리를 알아냈지만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아주 쉽게 그 진리를 포기해버렸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잘한 일이었다. 그 진리가 화형을 감수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삶의 의미를 거부했던 사상가들 중에서 삶을 거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논리를 밀어붙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가끔씩 농담 삼아서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 앞에 앉아 자살을 찬미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물음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베르 카뮈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삶이란 것이 힘들게 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대서라도 해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친근한 세계이다. 그에 반해, 갑자기 빛과 환상이 사라진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은 이방인이 되었다고 느낀다. 이런 추방이 절망적인 까닭은, 이젠 고향을 잃어버려 더 이상 고향을 추억할 수도, 약속된 땅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무상하고 삶은 헛되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의 증명은 자살로서 이루어진다. 자신이 과학을, 우주를 너무 잘 이해하는 인간이라고 자부심이 있다면 당장 죽어서 그 이해심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증명은 오로지 자살로 이루어진다. 죽지 않는 다는 것은 삶이 헛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우주가 무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무상(無常): 상주하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나고 죽고 흥하고 망하는 것이 덧없음을 이르는 말.
※상주(常住): 생멸의 변화가 없이 늘 그대로 있음.
※덧없다: 보람이나 쓸모가 없어 헛되고 허전하다.
"삶의 의미를 거부했던 사상가들 중에서 삶을 거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논리를 밀어붙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가끔씩 농담 삼아서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 앞에 앉아 자살을 찬미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행복론.
⑴사람은 나지 않음이 행복하다.
⑵태어났으면 일찍 죽는 것이 행복하다.
⑶일찍 죽지 않았으면 자살하라.
우리 인간은 모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서라도 삶을 해명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말이 되는 소리만 해야 한다면 자살로서 그 말을 끝맺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말은 우리 모두, 우주는 무상하며 삶은 헛되지만,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해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그 이유가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일지라도 말이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로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휴식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로 차츰차츰 빠져들어 가는 순간마다, 그는 자기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자살하지 않고 하루를 더 살아가는 것은 성실하게 바위를 한 번 더 옮기는 것이다. 바위가 아무리 언덕에서 굴러떨어져도 다시 올려놓고 말겠다는 태도가 우리 인간을 그러한 헛된 운명보다 우위에 서 있게 만든다. 그러한 인간은 바위보다 더 강하다. 바위가 언덕에서 떨어지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는 언덕을 오를 수도 없으며 내려갈 수도 없다. 바위를 언덕에 올려놓고 말겠다면 언덕은 오를 수 있으며 내려갈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운명의 개척자이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Appius Claudius Caecus)
우주는 무상하며 생멸변화한다. 지구는 잠시 생겼다가 수많은 생물들이 잠시 살았다가 그리고 전부 사라질 것이다. 인간은 잠시 태어났다가 수많은 음식을 먹었다가 그리고 사라질 것이다. 우주는 무상하다 그리고 허무하다. 우리는 허무 속에서 허무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야만 한다. 아니, 만들어내야 한다. 창조해야 한다.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허무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이 가진 힘이며 신의 분노에 저항하는 창조 능력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의 태도로 만들어낸다.
※생멸변화(生滅變化): 일체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하여 한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쳐준다. 그도 또한 모든 것은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 주인이 없게 되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지나 하찮은 것이 아닌 듯하다. 이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의 빛 하나하나가 유독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만 한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 인간을 상상해야만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과 상황은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필요한 것들이며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타인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행위이며 전부 의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성실하게 살만한 가치가 있다.
바위를 끝없이 올려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바위를 끝없이 올려야 한다는 운명에 투쟁하고자 한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운명에 이긴 것이며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낙원의 파랑새는 자신을 잡으려 하지 않는 사람의 손 위에 날아와 앉는다. -존 베리(John Berry)
-만화 베르세르크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908년 쓴 마지막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아모르 파티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그러나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바위를 언덕에 올려놓으려고 하지 마라.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올려놓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만족하라. 삶은 이미 전장의 한가운데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투쟁하라.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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