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肯定): 일정한 판단에서 문제로 되어 있는 주어와 술어와의 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는 일. ‘S는 P이다.’라는 형태의 명제를 참이라고 승인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인간이 되어라.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긍정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긍정이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고통으로 점철되었다면 나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긍정적인 인간의 태도이다. 나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거짓말은 금세 드러난다. 그런 거짓말을 하는 인간은 누구보다 부정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그 인간은 하나의 죄, 하나의 거짓말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죄, 또 다른 거짓말을 한다. 그것은 자신이 긍정적인 인간이라는 거짓말이다. 자신의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삶은 고통스럽지 않다고 거짓말한다. 그러한 거짓된 태도는 악덕사채업자가 이자를 받아 가듯, 고금리의 고통으로 그 죄를 갚아야 한다.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절대 죽지 않는다. 산 채로 묻혀서 나중에 더 추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긍정은 또한 즐길 긍(肯)자와 정할 정(定)를 쓴다. 정(定)이란 운명은 말하는 것이다. 긍(肯)이란 그 운명을 즐겁게 맞이하라는 뜻이다.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그런 운명을 즐기는 태도야말로 긍정적인 인간의 태도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고 즐기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운명,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지, 결코 긍정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엄살 부리지 말라. 하지만, 인내하지도 말라. 그저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
※엄살: 아픔이나 괴로움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보태어서 나타냄. 또는 그런 태도나 말.
※인내(忍耐):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
그렇다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으로 붓다(बुद्ध)의 아이디어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아이디어란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제법무아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생겼으며 변하지 않는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한다. 태어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이상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가정하에) 점점 더 참다운 자신, 진정한 자신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을 말이다. 힌두교에서는 이러한 개인에 내재한 인격적 원리, 근원이 있다고 보고, 이를 아트만(Ātman)이라고 하였다. 한자로는 我(아)로 표기하며 아트만이란 아(我, 자아, 자신)가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붓다는 이러한 생각을 부정한다. 그러한 아(我)는 없고, 무아(無我)하다고 말이다.
즉, 운명을 즐길 수 없는 것, 고통으로 만드는 원인은 아(我)가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자신이란 존재가 사실 이런 존재, 아(我)인데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 어떤 물건이 내 것, 아(我)여야 했는데,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것은 고통이 된다. 아(我)란 없다. 내 것이란 없다. 세상에 내 것이 없다. 나 또한 없다. 무아하다. 돼야 했던 나(미래)는 없다. 나(현재)만 있는 것이다. 이 나(현재)라는 것은 인연으로 만들어진다.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는 상호작용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상호작용이란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다르게 드러난다. 나라는 존재가 상호작용할 때, 사랑하는 상대와 증오하는 상대에게 동일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서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동일하여도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도 동일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는 상대와 상황이 동일하여도 내가 다르다면 다른 상호작용으로 나타난다.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공유하는 것은 기억 정도일 것이다. 기억마저도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남는 것은 인연(운명)밖에 없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르며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다. 나는 10년 전의 나 자신과 다르며 동시에 10년 전의 나 자신과 똑같다. 내 삶은 안정적인 혼돈이며, 혼돈과 반복 둘 모두다.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드러나며 결정된다. 인연 그 자체가 매 순간 아(我)를 창조해내는 것이지, 아(我)가 인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 것(운명)이란 인연을 말하는 것이다. 즉, 나의 인연이 아닌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내 것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집착으로 인한 고통은 영원하다. 자신의 운명(인연)을 사랑하라. 그것만이 내가 소유한 것이다. 나머지는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는 망상, 내 것이어야 한다는 집착은 고통은 스스로 창조해낸다. 그것은 고문과 같다. 자신에 대한 고문을 멈추어라. 내 것이 이닌 것에 대해서 집착 말고 놓아주어라. 나의 운명, 나의 인연을 사랑하라. 그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아무리 큰 것에서 아무리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너가 현재 고통스럽다면 그것이 인연이며 그것이 운명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그것은 본래 내 것이어야만 했기 때문에 내 것으로 인연된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다. 본래 내 것일 수 없는 인연들은 전부 나를 피해 도망갔다. 그것은 내 것으로 인연되지 않을 운명이었다. 사랑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아니 된다.
정당한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지나친 소유는 소유 자체가 주인이 되어 소유자를 노예로 만든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실연당했는가?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사랑하라.
너는 실연당했어야 할 인과에 놓여있다. 그것이 너의 인연이며 소유이다.
인정받지 못하는가?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사랑하라.
너는 인정받지 못하는 인과에 놓여있다. 그것이 너의 인연이며 소유이다.
빚을 졌는가? 그것이 너의 운명이다. 사랑하라.
너는 빚을 졌어야 하는 인과에 놓여있다. 그것이 너의 인연이며 소유이다.
운명을 긍정(肯定)하라. 긍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운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해줄 뿐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908년 쓴 마지막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아모르 파티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그러나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할 수 없다면, 너는 그저 운명에 끌려다니는 삶을 영겁의 시간에서 거듭하게 된다. 하루의 생이 일생과 같다. 하루의 운명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다음 날, 그러한 고통은 반복되며 그다음에도 반복된다. 영겁의 시간에서 반복된다. 하루가 일생과 같고 일생이 영겁과 같다. 인간은 우주와 같다. 영겁의 시간 동안 거듭된다는 것은 일생의 시간 동안 반복된다는 것이다. 운명을 사랑한다면 영겁(일생)의 시간 동안 고통은 없으며 더 나아질 수 있다. 운명을 사랑할 수 없다면 영겁(일생)의 시간 동안 고통은 반복될 것이다. 오늘이 내일과 같다. 또한, 오늘이 어제와 같다. 우리 인간에게 미리 주어지거나 미리 약속된 아(我),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인연(찰나)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운명이다. 그러한 인연은 현재를 대하는 나의 태도로부터 나오며 나의 고통은 내가 스스로, 그러한 운명을 부정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에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된다. 현재를, 인연을, 운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 그러한 태도는 시간을 윤회하여 인과를 창조한다.
오, 사람아!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또 끝날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긍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으로 고통은 잠들 것이다.
긍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으로 삶은 의미를 찾을 것이다.
긍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부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으로 삶은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부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 그것으로 죽어갈 것이다.
현재(찰나)를 대하는 태도의 힘은 현재에 머물지 않는다. 시간의 모든 방향으로, 미래, 현재, 과거 전부 꿰뚫고 모든 인연(인과)를 새로이 창조해낸다. 인간은 신(우주)과 같은 힘을 지녔다. 인과의 창조주이며 전능하다. 부정적인 태도를 현재 갖는 것으로 과거와 미래 또한 그렇게 된다. 긍정적인 태도를 현재 갖는 것으로 과거와 미래 또한 그렇게 된다.
물리학을 믿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란 단지 고질적인 환상일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선근선과(善根善果)이며 악근악과(惡根惡果)이다.
긍정선과이며 부정악과이다.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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