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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데라우스티오 2024. 3. 15. 07:58

 

행복이란 욕망하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하는 것을 얻은 후 그것을 재차 얻게 된다면 느끼는 행복은 처음과 같지 않다. 욕망이 처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며 행복이란 욕망이다. 욕망이란 고통의 상태에서 그 고통의 해소되길 바라는 것이며 욕망은 고통에 의해 생겨난다. 우리는 건강을 잃으면 건강을 갈망한다. 그 이유는 건강하지 않음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건강한 상태에서는 고통이 없고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고통이 있기에 건강할 때는 건강함을 바라지 않지만 건강하지 않을 때는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여 건강을 갈망하게 된다. 행복이란 고통의 해소이다.
※행복=고통의 해소(소멸)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과 양념은 허기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 극작가, 시인이라고 불리며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을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조건은 음식 그 자체가 가진 훌륭함이 아닌, 그것을 먹는 인간이 가진 허기(고통)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배가 터지도록 무언가 먹은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거나 가장 비싼 음식을 주어도 음식의 훌륭함은 배가 부른 상태의 그에게는 오히려 고통으로 느껴질 것이다. 허기진 상태에서는 음식은 행복이었으나 허기(고통)가 사라지면 행복 또한 같이 사라지며 배부른 상태에서도 먹어야 하는 것은 고통이 된다.
※고통의 소멸=행복의 소멸 | 고통 해소 수단의 과잉 반복=고통

즉, 행복이란 무엇에 고통받고 있는지에 따라 바뀐다. 고통이란 몸의 아픔과 마음의 괴로움이며 고통은 신호이기도 하다. 고통이라는 신호를 감지할 수 없다면 몸에 상처가 나도 아픈 줄 몰라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 사망에 이르거나 배가 고파도 허기를 느끼지 못해, 음식에 대한 맛(욕망)이 떨어져 음식을 갈망하지 않게 되어 아사할 수도 있다. 고통이란 우리의 몸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길잡이, 목자)이며 고통이 없다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게 되어 그것을 방치하고 사망하게 될 것이며 또한 행복을 느낄 수도 없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악(惡)을 해소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고통=목자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행복을 느낄 수도 없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행된 고통의 해소에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으나 행복은 또한 찰나에 존재한다. 해소된 고통은 사라졌을 뿐 그 자리에 행복이 채워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태가 길어지면 고통도 행복도 존재하지 않음에서 다시금 지루함(고통)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지루함은 행복(고통)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지루함이 길어지면 행복을 갈망하는 것을 넘어, 고통을 갈망하게 된다. 고통은 행복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인간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사라진다.
※고통=행복의 씨앗

허기진 인간은 음식을 갈망한다. 그 갈망은 행복의 실마리가 된다. 하지만 그 갈망의 상태가 지속되면 그것은 고통이 된다. 해소되는 고통은 행복이지만 해소되지 못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고통은 해소를 갈망한다. 하지만 배가 부르며 지루한 인간은 허기를 갈망한다. 허기 진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는 배부른 상태에서 허기 진 인간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허기진 상태를 갈망하는 것이다. 음식이 충분할수록 더 이상 음식을 갈망하지 않는다. 갈망의 대상은 해소의 수단(음식)에서 해소해야 하는 상태(욕망) 그 자체로 바뀌며 갈망(고통)을 갈망하게 된다.
※고통의 해소=고통

욕망하고 있는 인간은 탐욕스러우며 또한 고통스러운 상태이다. 이러한 고통이 너무도 길어지면 욕망의 해소는 포기하고 욕망하지 않기(무욕)를 바라기도 한다. 그 욕망이 해소될 때 행복해지지만 행복은 찰나이며 그 찰나를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인간이 되지만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또한 고통스럽다. 욕망하지 않는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욕망을 욕망하는 것도 욕망이며 무욕을 욕망하는 것 또한 욕망이다. 소유한 상태에서 무소유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또한 소유욕이며 소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유욕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 또한 소유욕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과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인간은 상품(물건)을 구매할 때 언제 행복할까?
⑴어떤 상품(물건)을 구매하고 싶어질 때.
⑵그 상품(물건)을 구매할 때.
⑶그 택배(물건)을 기다릴 때(배송 중).
⑷그 택배를 받을 때(배송 완료).
⑸그 상품(물건)을 사용할 때

택배(물건)을 받을 때라고만 한다면, 택배가 도착하는 순간만을 행복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삶에 있어서 택배가 도착하지 않는 모든 순간은 행복이 아니게 된다. 우리의 삶이란 택배의 배송 완료가 아닌 택배의 배송 중, 기다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배송 완료란 찰나이고 잠깐일 뿐, 그것에 의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배송 중일 때 그것에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그 시간이 행복에 가깝다. 배송 중이 끝나면 기대도 끝나며 우리는 새로운 배송 중을 갈망하는 상태가 된다. 우리는 배송 완료를 갈망하는 것이 아닌 배송 중 그 자체를 갈망하는 것이다. 루소의 말대로 가진 것에 만족한다면 부자와도 같게 되겠지만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것은 배송 완료된 것들에 대해서만 만족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찰나이며 부유한 것일 수 없다. 찰나의 시간을 부유하게 산 인간과 대부분의 시간을 부유하게 산 인간 중 누가 더 부유한 것인가? 우리가 가진 것들의 대부분은 찰나가 아닌, 기다림이기에 행복의 극히 일부, 찰나만을 소유한 인간은 부유할 수 없다. 18세기 철학자 루소는 '배송 완료'에 만족(행복)의 라벨을 붙였지만 21세기의 나는 '배송 중'에 또한 만족(행복)의 라벨을 붙이고자 한다. 사회에 배송 중인 물건이 없다면 경제는 무너지고 모든 것은 그 의미를 잃을 것이다.

정점에 이른 자아는 자살을 바라본다. -무묘앙에오(無明庵回小)

20세기 철학자 무묘앙에오(無明庵回小)는 정점에 이른 자아는 자살을 바라본다고 하였다. 즉, 삶의 존재했던 그리고 존재할 모든 배송 물품에 대한 배송 완료가 되고 나면 더는 그 무엇도 배송 중이 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만족을 한, 한 인간은 더 이상 삶이 아닌 죽음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루소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 부자가 돼야 하지만, 에오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가진 것에 만족할 때 마다 죽음에 가까워진다. 이것을 RPG(Role-Playing Game)로 상상해본다 게임상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궁극적인 최대치까지 이룬 상태와도 같은 상태이다. 레벨은 최대치이며 장비는 더 이상 어떻게도 강화할 수 없는 수준에, 컨트롤 실력 또한 극한까지 갈고닦은 한 인간이 그 게임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더 이상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없다.
※에오는 '배송 완료'에 죽음(불행)의 라벨을 붙였다.

루소가 말하는 바는 욕망이 해소될 때만 그 해소에 비례하여 만족(행복)을 얻으므로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증가할수록 고통 또한 증가한다는 것이며,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감소할수록 고통 또한 감소한다는 뜻이다.
※욕망=고통

에오가 말하는 바는 욕망이 해소될 때만 그 해소에 비례하여 만족(행복)을 얻으므로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감소할수록 행복(만족) 또한 감소한다는 뜻이며(죽음에 가까워진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증가할수록 행복 또한 증가한다는 뜻이다.
※욕망=행복

우리가 루소적 관점을 믿는다면 우리는 만족할 때 마다 부자(행복)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에오적 관점을 믿는다면 우리는 만족할 때 마다 죽어간다(불행). 루소가 맞는 것일까? 에오가 맞는 것일까? 둘 다 맞다(또한 틀리다). 만족과 고통, 행복과 불행은 하나(고통, 중첩)이다.
이제 나는 만족과 고통의 라벨을 ⑴, ⑵, ⑶, ⑷, ⑸ 전부에 붙이고자 한다. 그리고 또한 ⑹에도 붙일 것이다. ⑹은 그 상품(물건)을 버릴 때이다.

버림으로써 얻으리라. 그대여, 탐내지 말라. -《우파니샤드》

그렇다면 어떤 행복관을 가져야 하는가? 옛날에 두 대장장이가 있었는데 한 대장장이는 탐욕스러워서 더 편하게 일하고자 했고 자신이 만든 물건은 더 비싸게 팔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 대장장이의 삶이자 욕망이었는데 돈과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썼다. 그리고 또 다른 대장장이는 자신이 만든 검과 갑옷이 더 튼튼하길 바랬는데 자신이 가진 실력에 만족하는 법이 없고 항상 어떻게 하면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그것은 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의 목숨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의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많아졌고 돈은 그에게로 모였으며 명성 또한 얻었고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탐욕스러운 대장장이는 무엇을 얻었을까? 돈을 벌기를 원했지만 돈도 벌지 못하였으며 삶 또한 얻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탐욕스러운 대장장이는 고통 속에서 이미 가진 돈을 바라보며 만족하고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자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당신이 화장품을 판매한다면 손님의 피부를 이전 보다 좋게 하여 그가 가진 고통을 줄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돈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사기이지. 판매행위라고 부를 수 없다. 돈을 번다는 것은 상대에게 이타적인 도움을 주어 그가 가진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돈을 벌고자만 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자신이 가진 고통만을 줄이려는 것으로 돈을 벌기는 힘들 것이다. 타인의 안위를 걱정할 때 돈은 주어질 것이다. 돈을 가지려 할 때 돈은 떠나갈 것이다.

낙원의 파랑새는 자신을 잡으려 하지 않는 사람의 손 위에 날아와 앉는다. -존 베리(John Berry)

노동의 가치는 돈으로 매겨지며 노동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돈을 벌 수 없을 것이며 우리는 가치 없는 것에 돈을 쓰지 않는다. 행한 노동이 가치 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내고자 할 것이다. 가치란 그것이 그 사람들의 고통을 얼마나 줄여줄 수 있는지에 달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치를 제대로 매길 줄 모르며 가치가 있다고 해서 항상 가치가 올바르게 매겨졌다고는 할 수 없다. 마약 또한 고통을 줄여주지 않는가? 어떤 가치들은 미래의 행복을 미리 대출하여 현재에 가치가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 사람들이 그것에 가치를 매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가치 있지 않다고 하여도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역시 가치 없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 할 뿐이라는 합리화일 수도 있으니 현명하게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돈은 이타적 행위에서 주어지며 이타적 행위 또한 자신의 이기심과 합치될 수 없다면 그것이 올바르다고 하여도 그것을 행할 의미나 이유는 찾을 수 없다. 돈을 벌되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서도 자신 또한 그것을 욕망하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타인에게만 이로운 일을 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자신에게만 이로운 일을 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자신에게만 이로운 일을 하면 그 무엇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앞서 말한 대장장이의 경우에서 행복의 순위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세가지 변수를 생각할 수 있는데 자신이 검을 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얼마만큼 있는지와 그 능력을 자신이 욕망하는지 그리고 그 검에 대해서 타인에게 얼마만큼 인정받는지이다.

검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란
⑴검을 만들 능력조차 없는 것.
⑵조잡한 검을 만들 능력이 있는 것.
⑶평범한 검을 만들 능력이 있는 것.
⑷뛰어난 검을 만들 능력이 있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머지 두 변수를 고려하자면 뛰어난 검을 만들 능력이 있고 타인에게 인정받는다고 하여도 자신이 그것을 욕망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고 또는 뛰어난 검을 만들 능력이 있고 그것을 욕망하여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또는 그것을 욕망하고 타인에게 인정도 받지만 조잡한 검밖에 만들 수 없다면 이 또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엄청난 부자이겠지만 말이다.
※행복=능력×욕망(자신의 욕망, 이기적)×인정(타인의 욕망, 이타적)
※어느 지점에서든 0을 곱하면 결괏값은 0이 된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화가가 된 지 10년 가까이 되어서도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였으며 그는 가족에게 자신이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하였다. 그는 발작 증세도 있었고 그것이 더 심해져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불안감도 컸다. 1890년 7월 27일, “고통은 영원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했다. 고흐가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이라는 그림은 1993년 8,410만 달러에 판매되었다. 고흐에게 있어서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죽은 이후보단 살아있을 때가 더 나았을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눈이 멀어서 누가 재능있고 누가 노력을 하는지 모를 수 있다. 올바른 재능으로 올바른 노력을 하고 올바르게 산다고 하여도 행운의 여신의 요행에 따라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행운의 여신의 탓인데도 자신의 재능과 자신의 노력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여신의 변덕, 동전 던지기에 정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동전이 앞면이길 바라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운명의 개척자이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Appius Claudius Cae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