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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악한가?

데라우스티오 2024. 3. 14. 06:14

돈을 욕망하는 것은 악한가?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의사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서 들인 노력과 시간이라는 재화는 무엇으로 보상해 주어야 하는가?

 

선한 의도와 목적성을 가진 의사가 병원을 운영한다. 이 의사는 너무 선해서 돈보다 항상 환자의 생명을 우선시하였다. 그 결과 10명의 환자를 살렸으나 병원 건물 월세와 직원들의 인건비를 내지 못하였고 빚더미에 앉았다. 이혼을 당하고 삶은 파괴되고 노력과 시간을 보상받지도 못하였다. 병원은 아주 짧은 순간 존재하였고 일자리는 사라졌다. 한 개인으로서도 불행하고 실패하였다. 선한 의도와 목적성만 가진 것은 작은 사랑이라고 한다.

 

큰 사랑이란, 환자의 생명을 우선시하고 또한 합당한 돈을 받는 것이다. 그 돈으로 병원 건물의 월세 내고 병원 직원들의 인건비도 주고 자신도 노력과 시간을 보상받는 것이 큰 사랑이다. 그 돈으로 병원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단지 10명을 살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000명 10,000명도 살리는 큰 사랑이다. 이혼당하지 않으며 자식들도 키워내어 사회의 일원이 되고 사회를 순환시킨다. 병원 직원들 또한 그 돈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선한 의도만을 가진 의사는 새로운 환자가 생기면 보고만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탓할 것이다. 적어도 선한 의도를 가진 자신을 탓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남 탓만을 하므로 사람을 살릴 수 없는 것이며 살릴 자격이 없다. 선한 의도만을 가진 멍청이는 제일 악하다. 돈만 밝히는 의사보다도 악하다. 적어도 돈만 밝히는 의사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 가장 선한 의사는 환자를 최우선으로 하며 합당한 보상을 받는 의사일 것이다. 돈을 밝히는 의사는 합당하지 않은 보상(폭리)을 취하는 것이지 환자를 살려낼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의도와 목적성만으로는 환자를 결코 살릴 수 없다. 선한 결과만이 선하다. 환자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며 살기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살리지 못하는 의사는 최악의 의사이며 가장 악하다. 환자가 돈이 있으며 살길 원한다면 살려야 한다. 그것이 선이다.

 

요리사가 요리만을 생각하는 것은 작은 요리사이다. 요리사는 또한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큰 요리사이다. 요리사가 요리에 행복함을 느끼고 합당한 가격에 요리를 팔아야 한다. 그것으로 식당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돈은 순환한다. 순환하는 지속성이 사회의 가장 큰 지복이며 선함이다. 자신이 자신 스스로가 오랫동안 행복하길 원한다면 합당한 돈을 받아야 한다. 합당하지 않은, 충분치 않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식당을 지속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도 불행을 주기에 악하며 그 식당을 좋아하고 그 식당의 음식을 좋아하는 손님들에게도 악하다. 손님들 또한 오랫동안 그 식당의 음식을 먹길 원하는데, 돈을 충분히 받지 않아서 망해버리는 것보다 악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스스로 행복하며 자신이 행복이 타인의 행복과 엮여있다면(공유한다면) 자부심을 갖고 돈을 받아야 한다.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돈을 합당히 받지않음으로 일어나는 결과는 개인의 붕괴이며 개인의 붕괴가 누적되면 사회(세계)는 붕괴할 수 밖에 없다. 존재함에 있어서 존재함을 지속하는 것보다 최선은 없다. 존재를 지속할 수 없다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최악)뿐이다.

 

자식을 사랑만 하는 것은 작은 사랑이다. 자식이 지속적으로 일생(一生)을 행복할 수 있길 목적하고 이루어내는 것이 큰 사랑이다. 자식이 짧은 순간만을 행복하길 바라는가? 그것은 좁디좁고 작디작은 사랑이다. 일생이 행복하여야 최선이다. 일생이 행복하다는 것이 일생의 고통이 전혀 없음이라는 뜻은 아니다. 행복 안에도 고통이 있으며 불행 안에도 쾌락이 있다. 단지, 큰 사랑은 쾌락에도 휘둘리지 않으며 고통에도 무너지지 않는 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사회의 일원이 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년 6월 5일 ~ 1790년 1월 12일)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배분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비유하였다. 어떤 상품의 공급량에 비해 수요량이 많으면 가격이 상승하게 되고, 이는 생산 자원이 더 많이 투입될 필요가 있다는 신호로 작용한다. 반면 수요량이 공급량에 비해 작을 경우에는 가격이 하락하고, 이는 생산 자원이 다른 산업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우리가 우리의 저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류애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中

 

내가 타인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에게 제공하길 바라고 있다고 해서 타인이 제공할 리 없다. 나 또한 그러하다. 내가 필요한 것을 나에게 필요 한만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선하다. 나 또한 그러하다. 내가 돈보다 상대방이 가진 물건을 바란다면 돈을 주고 그것을 받는 것은 상대방의 선함이며 상대방이 자신이 가진 물건보다 돈을 바란다면 돈을 주는 것은 나의 선함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의 저서 국부론에서 국가의 경제를 자유방임 하여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선함이 지속할 것으로 믿었다. 그 믿음은 결과적으로 틀리긴 하였지만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하고자 함은 타인들의 선함을 단지 인류애에 기대하는 것은 고작 10명의 환자를 살리고 파산하는 최악의 의사만이 기다린다는 것이고 어떤 의사가 선한 의도도 없고 선한 목적성도 없더라도 단지 돈만을 목적으로 하여도 그러한 최악의 의사보다는 환자를 더 많이 살릴 수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회의 선함은 순환한다는 것이다.

 

"돈을 벌려면 타인의 이익을 생각하여야 한다. 타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는 돈을 벌 수는 없다. 제빵업자가 돈을 바라지 않는다면 빵이 필요한 인간들은 어디서 빵을 얻는가? 제빵업자가 돈을 바라면 바랄수록 제빵업자의 선함은 누적된다. 제빵업자가 합당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만큼, 제빵업자가 쌓은 돈은 그 제빵업자의 선함과 비례한다."라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믿음이자 의지였다. 물론, 틀렸지만 실제로 적용해 보니 자유방임주의로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긴 어려웠다. 대공황 이후 자유방임주의(작은 정부)는 끝이 나며 수정자본주의(큰 정부)를 맞이한다. 하지만, 자유방임주의든 수정자본주의든 해야 할 일은 같다. 본질은 사람들이 단지 돈만을 쫓을지언정 그 돈만을 쫓는 자신의 욕망으로 자연스럽게 의도치 않더라도 선한 행위를 하게 되게 만드는 것이다. 제빵업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빵을 만들지만 결국 타인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선한 행위를 한다. 제빵업자가 돈을 바라지 않는다면 자신의 빵을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시장경제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은 오로지 하나의 본질을 목적으로 한다. 국가가 가진 공권력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제도로 규제하는 것, 처벌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 어떠한 경우란 어떤 사람이 선하지 않더라도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행동함에 있어서 그 돈을 버는 과정에서 악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이다. 국가가 규제와 처벌을 통하여 돈을 버는 과정에서 선한 행위만을 할 수 있도록, 그 국가의 시장 규칙을 잘 설계하였을 경우, 그 국가의 시장경제는 애덤 스미스가 꿈꾸던 시장 경제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만으로도 그것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자유방임만으로 가능하려면 모든 인간이 휴먼(Human)이 아닌, 이콘(Econ)이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애덤스미스의 실패는 국부론의 실패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들이 이콘(Econ)이 아닌 휴먼(Human)인 이유로 인한 실패이기도 하다. 이콘(Econ)은 경제학 용어로 냉철하게 자신의 이익을 계산할 줄 아는 합리적 존재를 뜻하고 휴먼(Human)은 유혹과 선동에 넘어가는 비합리적 존재를 뜻한다. 인간은 이콘(Econ)이 아닌 휴먼(Human)이기에 자유방임만으로는 선을 유지하기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단지 돈을 많이 번다고 비난받는다면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하는 인간이 너무도 많은 국가가 되었다면, 그 국가는 신뢰가 적은 사회이고 그 비난의 책임은 그 개인에게만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한 의심이 들도록, 돈을 버는 행위에 악함이 끼어들도록 방치한 국가의 책임이 크다. 국가는 돈을 버는 행위가 선한 행위를 동반하기를 목표하고 그 결과를 이루어내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의 큰 사랑이다. 돈을 뿌리는 것은 작은 사랑이며 돈만을 바라게 만드는 국가 즉, 악한 행위를 동반하여 돈을 벌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국가 운영을 방치하는 국가가 있다면 그런 국가는 악하다. 돈은 오직 선하게 벌어야 하며 악하게 버는 돈은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국가는 자본주의라 볼 수 없다. 유사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절대 악하지도 않으며 돈만을 갈망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좆같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좆같이 만들 뿐이다. 또는 좆같은 인간이 돈을 좆같이 버는 것이다. 또는 좆같은 인간(구매자)들이 돈을 버는 행위가 좆같다고 생각되게 행동한다. 전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경제사범은 정말로 사형시켜야 한다. 경제사범에 대한 처벌이 대한민국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보다는 처벌이 약한데, 이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수 많은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선할 의지를 죽이는 경제사범이 실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여 처벌이 약하다면 사회 붕괴를 가속시킬 것이다. 실제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는 아무리 많이 죽여도 100명도 죽이기 매우 어렵다. 선할 의지가 없는 사람으로 가득한 사회에서는 몇 명이 죽겠는가?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살아갈 의미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25살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식은 75살에 치른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숨이 붙어 있다고 전부 살아있는 인간은 아니다.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인간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시체이다.

 

돈과 재화의 교환은 선의 교환이다. 돈을 내는 쪽이 주인도 아니며 재화를 주는 쪽이 하인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한다. 돈은 나의 선함이며 나의 선으로 상대방의 선을 구매하는 것이다.

 

만약, 돈을 버는 행위가 악해 보인다면, 아니꼽게 보인다면 너는 자본주의에 필요하지 않은 인간일 수도 있음을 반성하여야 한다. 이 사회에는 그딴 쓰레기 같은 인간은 한 명도 필요하지 않다. 돈은 벌지도 않으면서(또는 조금 벌면서) 남 돈 버는 것은 아니꼽게 보는 놈들 말이다.

 

豚眼只有豚 佛眼只有佛(돈안지유돈 불안지유불)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돈을 욕망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아라. 그것으로 지복 하다면 자부심을 가져라. 그것을 시기 질투하는 인간들은 자본주의에 필요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사회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