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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데라우스티오 2024. 3. 14. 03:47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니체의 철학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니체는 '낙타→사자→아이'로 인간의 정신이 3단계의 변화를 거친다고 하였다.


낙타는 한 번에 약 114리터의 물을 체내에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막에서 물없이 길게는 20일정도 버틸 수 있다고 하며 극단적으로는 몇 개월을 버티기도 하며 사막의 유일한 운송수단이다. 낙타가 지방을 체내에 충분히 저장하였다면 음식 없이 4~5개월 생존 또한 가능하다. 극단적인 외부 압력을 버티는 태도의 상징이 낙타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비추자면 낙타는 노동자에 해당할 것이다. 니체의 철학을 읽고, 낙타라는 태도와 그 위치, 상태를 하등한 것으로 이해하고 무시, 멸시하고 빠르게 배제 및 지양되어야할 태도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등하다고 생각되는 낙타조차도 되지 못한 인간들이 많다. 낙타는 결코, 하등하지 않고 너무도 가혹한 환경을 묵묵히 잘 견딘다. 인내와 견딤 조차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어찌 낙타를 하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니체는 정신의 변화가 3단계라고 하였다. 단계란 것은 순차적이다. 낙타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들은 사자도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난, 사자야! 낙타가 아니라고!" 사자란 낙타를 거친 인간들, 그 중에서도 일부가 되는 것이다. 아무 것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견딜 줄 아는 인간들을 어떻게 부릴 것인가? 니체는 인간의 정신변화가 3단계라고 하였지만 나는 하나를 더 만들고자 한다. '버러지→낙타→사자→아이'로 말이다. 낙타를 거부하는 인간은 사자가 아니고 버러지라고 한다. 사자란 그저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견딤을 거부하는 존재가 아니다. 견딜 줄 앎에도 그것을 거부하는 존재이다. 견딤을 그저 거부하는 존재는 버러지라고 한다. 무엇이든 저항하고 거부만하는 것이 인간 정신 성숙의 2단계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버러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부하지도 않고 교육 시스템을 까내리는 인간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으며 서울대생의 말에 더 귀기울인다. 견딜 줄 아는 인간의 저항 정신은 견딜 줄도 모르는 인간의 저항 정신보다 가치있다.

사자는 보통 50km/h, 최고 80km/h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추적거리는 100m~200m로 짧다. 사자는 굶주린 상태와 배가 아주 부른 상태를 반복한다. 일주일 동안 먹이를 잡지 못할 때도 있으나 대개 3~4일에 한 번씩 먹을 것을 잡아서 배가 부르도록 먹는다. 낙타는 자신을 짓누르는 짐의 무게를 견디고 사막을 가로질러 짐을 운송한다. 그것으로 먹이를 공급받아 생존하고 어쩌면 보람이나 행복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여 사자가 된 낙타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사막 한 가운데에 놓인다. 더 이상 짐꾼으로서 살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지도 않은 노동을 하여 먹이를 구걸할 필요도 없다. 자유로워진 것이다. 하지만 사막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였다. 사자에겐 더 이상 목줄도 없지만, 목자도 없다. 낙타였던 때, 힘들긴했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굶어죽을 것 같은 사자는 다시금 낙타가 되기로 한다. 사자의 지구력이 약하고 포식하면 잠잠해지듯, 사자는 저항 정신을 상징하나 그 저항의 태도가 그리 길지는 않은 것 또한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자는 저항의 상징이나 단순히 저항하고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사자가 될 수 없다. 사자가 되어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자유로워지면 그것은 자유인가? 사자는 사막 한 가운데에 놓일 것이며 굶어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인한 사자가 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가? 강인한 사자란 사냥 성공 확률이 높은 사자이다. 3~4일마다 꾸준히 사냥에 성공한다. 인간(타인)이라는 족쇄는 없지만, 낙타일 때와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자는 운송이라는 노동 대신, 사냥이라는 노동을하고 어쩌면 사냥 후에 보람이나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운송을 못하게된 낙타는 쓸모없어서 버림받을 것이듯이, 사냥을 못하게된 사자는 굶어죽게 될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낙타의 족쇄의 주인이 인간(타인)이었다면 사자의 족쇄의 주인은 신이 된 것뿐이다. 족쇄에 대해서 저항하고자 하였던 것이 사자의 정신이라면 족쇄의 주인만 바뀌었기 때문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노동 환경이나 노동에 대한 대우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노동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을 사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유로운가?

 

원함과 원하지 않음 그리고 행위를 함과 하지 않음은 4가지 경우의 수를 만든다.
4가지 중 3가지는 고통의 경우의 수이다. 다음과 같다.⑴원하지 않는 일(0)을 하는 것(1)은 고통(0)이다.
⑵원하는 일(1)을 하지 못하는 것(0)은 고통(0)이다.
⑶원하지 않는 일(1)을 하지 않는 것(0)은 고통(0)이다.

⑴과 ⑵가 자유롭지 않고 고통이라고 해서 ⑶을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고통이다. 당신의 남은 인생의 모든 노동에 대한 선택권 2가지를 주겠다.
※주 5일제, 하루 8시간 노동이며 나머지 조건은 노동법을 따른다.
⑴공장에서 단순노동을 반복하는 일.
⑵작은 방에서 스마트폰 및 컴퓨터로 게임 또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떠도는 일.
어떠한 것을 선택하든 급여는 매월 지급된다. 하지만 일생의 남은 시간 동안 그것만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지에서는 당연히 ⑴보다는 ⑵를 고를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⑵만 한다면 그 인생은 과연 가치가 있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다. 단순히 사자의 저항 정신을 ⑴에 대한 저항으로만 생각한다면 저항하여 도착한 곳은 ⑵일 것이다. 사자의 정신으로서 저항만을 강조하는 것은 정신 성숙의 롤모델로서 그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이상적인 방향 제시라고는 할 수 없다. 사자는 저항하여 개선하고자 하여야 한다. 매번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저항한답시고 퇴사해 버리는 인간보다 그 회사에 남아서 그 회사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 사자의 정신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낙타가 노동자라면 사자는 관리자일 것이다. 사자는 회사의 불합리함에 대한 저항으로 그 족쇄를 사장에게서 뺏어와 노동법, 노동윤리에게 쥐어준다. 앞서 말했듯이 여전히 족쇄를 찬 상태이며 이전보단 낫지만, 여전히 고통스럽다.

낙타처럼 견딜줄도 알며 사자처럼 저항할 줄도 아는 인간은 이제 아이로 나아간다. 4가지 중 1중 가지의 경우의 수는 원하는 일(1)을 하는 것(1)이다. 그 (이상적인) 결과는 행복(1)이다. 족쇄의 주인을 타인에게서 신으로, 신에게서 나에게로 뻇어오면 그제 서야 신은 죽는다.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97년,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년 10월 25일 ~ 1973년 4월 8일)가 13세 때 그린 〈과학과 자비〉이다.

1937년, 피카소가 57세 떄의 그린 〈우는 여인〉이다.

낙타, 사자, 아이를 화가의 예술 활동으로 빚대자면 낙타와 사자의 차이는 그 그림의 주문자의 주체가 자신인지 아닌지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피카소가 〈과학과 자비〉를 커미션을 받고 그린 것이라면 낙타로서 그린 것이며 〈과학과 자비〉를 자신이 그리고자하여 그린 것이라면 사자로서 그린 것이다. 사자로서 그림을 그릴러면 경제적 자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자신의 그리고자한 것을 자유로이 그린다하여도 그것은 여전히 신의 족쇄 하에 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공통의 인지 감각이며 그것은 유전자(신)에 의해 선험적으로 형성된 기존 가치이다. 그림의 주문자의 주체가 나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 신이 나에게 커미션을 주고 주문한 것과 같다.
※커미션(commission): 어떤 일을 맡아 처리해 준 데 대한 대가로서 주는 요금.

수 많은 화가가 경제적 자유를 이룬 상태에서 각자의 화가들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런 상황에서도 어쩐지 어느 화가의 그림을 봐도 엇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신이 화가들을 통해서 그림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근원, 유전자, 본성)은 그림을 사실적(이성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규칙을 부여하고 화가는 그러한 규칙에 따라 스스로의 그림과 다른 화가의 그림들이 얼마나 사실적(이성적)인지 감시하고 평가한다. 그런 신의 규칙에 따른 상호감시와 평가아래 화가가 아무리 많아도 모든 그림들은 엇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포스터모더니즘(탈근대주의)란 모더니즘(근대주의)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서양의 사회, 문화, 예술의 총체적 운동을 일컫는다. 근대주의의 핵심인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이다. 이성 중심주의인 시대에서 이성(신)이라는 하나의 원칙에 따라 피카소의 그림 〈우는 여인〉을 본다면 우리는 신(이성)의 관점과 신의 규칙 아래 그 그림의 가치를 평가하고 낮은 가치로 인식한다.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대들은 밝은 아침에 등불을 켜고 시장으로 달려가 쉴새없이 이렇게 외치는 미치광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신을 찾는다! 나는 신을 찾는다!"

주변에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서 있었으므로, 그는 더 많은 조소를 일으켰다. 길이라도 잃은 것인가? 누군가가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길을 못 찾고 헤메는 것인가? 또 다른 이가 말했다. 아니면 그는 숨는 것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여행을 하던 것인가? 이민을 위해 온 것인가?—이렇게 그들은 소리치고 웃었다. 미치광이는 그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내가 가르쳐주리라.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였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전부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쓸어내어 버릴 스펀지라도 주었는가? 우리가 이 지구를 해로부터 풀어주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이제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는가?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모든 방향으로? 아직도 위쪽이 있고 아래쪽이 있는가? 우리는 끝없는 허무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빈 공간의 흐름을 느끼지도 못하진 않는가? 계속해서 추워지지는 않는가? 밤이 우리를 점점 궁지로 몰아가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아침에도 등불을 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직도 사토장이들이 신을 땅에 묻고 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직도 신이 부패해 가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 또한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다음은 영화 아바타(2009)의 내용 중 일부이다.

숲 속에서 죽게 생긴 제이크를 네이티리가 구해준다.

제이크: 내 말 못알아듣겠지만 고마워 고미워 네가 아니었으면 난 끝장났을 거야 놈들을 죽여 줘서 고맙다고
네이티리: 감사는 됐어 감사할 일이 아냐 슬픈 일이지 아주 슬픈 일이야
제이크: 알았어 미안해 내가 뭘 잘못했든 사과할게
네이티리: 전부 네 탓이야 너 때문에 죽었어
제이크: 내 탓이라고? 날 공격했잖아

네이티리: 네 탓이야! 네 탓이야!
제이크: 진정해
네이티리: 애처럼 징징대고 아무것도 모르지
제이크: 좋아 좋다고 그럼 네 친구들이 날 죽이게 놔두지 왜 그런 거야?

네이티리: 왜 구해줬냐고?
제이크: 그래, 왜 구해줬지?

네이티리: 넌 강한 영혼을 지녔어 두려움도 없고 하지만 멍청해! 아이처럼 무지하지
제이크: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되면... 네가 가르쳐줘
네이티리: 하늘의 사람들은 보질 못해
제이크: 그럼 보게 가르쳐줘
네이티리: 그건 가르쳐서 되는 게 아냐

네이티리가 사는 세계에서 숲의 생태계란 숲에서 사는 존재들의 근원이며 신이다. 숲의 생태계와 네이티리의 운명은 운명공동체로서 같이 한다. 숲을 소중히 대하고 지속 가능하게 관리하는 것은 숲(신)의 규칙이 되며 네이티리의 부족인 나비족은 그 규칙을 따르며 이는 일원적이다. 실제 몸(운명)은 아바타 조종실에 있는 제이크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일원적(一元的): 근원이 하나인 것.

존재의 당위성에 대한 근원이 더 이상 어떤 하나가 아니게 될 때, 신의 힘은 나누어 퍼지고 신은 죽는다. 신의 죽음은 신의 부활이기도 하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네이티리가 본다면 그것의 가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제이크가 본다면 피카소의 생애와 시대적 의미와 상징성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평가할 수도 있으며 또는 그냥 제이크 자신의 경험에 비춰서 작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그 가치를 평가할 수도 있다. 그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 그 자체로서 존재(일원적)하는 것이 아닌,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관점(근원)에서 가치메긴다(다원적).
※다원적(多元的): 사물을 형성하는 근원이 많은 것.

니체는 인간의 정신 변화가 '낙타→사자→아이'의 3단계로, 마지막은 아이로 변한다고 하였다. 아이란 놀이와 규칙을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이다. 또한 그것의 가치도 스스로 메긴다. 이러한 인식은 현대미술의 풍조와 같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보여주려는 풍조이다. 이러한 풍조는 마치 나의 정신 변화가 니체가 말하는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고 성숙하였음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과 같다. 새로움이란 새로운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 즉, 나에게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새롭지 않다면, 내가 어떤 것의 근원이지 않다면 그것은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타인이나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이가 아니며 그것에 종속된, 자유롭지 못한 존재임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새로움이란 자유로움의 증명이며 내가 근원이어야만 자유로운 것이다.

네이티리: 넌 강한 영혼을 지녔어 두려움도 없고 하지만 멍청해! 아이처럼 무지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미술의 풍조가 그러하듯, 새로움으로만 자신의 인생의 자유로움을 증명하여야 하는가? 건축을 함에 있어서 구조적인 안정성을 무시한 채 그저 새롭게만 만들 수는 없다. 또한 그것은 더욱 낮은 레벨의 새로움이다. 새로움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움에도 레벨이 있는 것이다. 3명의 건축가가 있다. 1번째 건축가는 오직 새로움만을 중시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건축 양식을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이다. 2번째 건축가는 건물의 구조적 안정성을 최우선시하면서도 안정성을 지키면서 새로운 건축 양식을 보여주려고 하는 건축이다. 3번째 건축가는 안정성은 기본이며 그 이전 건축 양식보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였다.

안정되지 않은 새로움보다 안정된 새로움이 나으며 효율적이지 않은 새로움보다 효율적인 새로움이 낫다.
아이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정되지 않은 자유로움은 보다 수준 낮은 자유로움이며 효율적이지 않은 자유로움은 보다 수준 낮은 자유로움이다.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18세기 후반~19세기 동안 정부가 시장에 관여하지 않는(작은 정부) 시장 자유주의를 채택하였다. 시장을 자유롭데 둘수록 서로 경쟁하고 경쟁은 자연스럽게 적자생존을 유도하고 시장 경제에게 가장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1929년 경제대공황 후, 정부가 시장에 크게 관여하는(큰 정부) 수정 자본주의를 채택한다. 이 역시도 스태그플레이션이 심화하여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를 맞이한다. 신자유주의란 자유(작은 정부)도 아니며 규제(큰 정부)도 아니다. 적절한 규제하의 적절한 자유가 시장 경제를 건강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인플레이션 지수가 높고, 경제 성장 지수는 낮으며 실업률은 높은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

자본주의가 그러하듯 새로움에서 새로움(자유로움)만을 중시한다면 정신적 대공황,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게될 것이다. 새롭지 않되 새로운 새로움이 새롭기만 한 새로움보다 더 가치 있다. 이 우주와 동떨어진 새로움보다 이 우주 속의 새로움이 더 가치 있다. 단지, 특별하기만 한 새로움보다 실용적인 새로움이 가치 있다. 동굴 속 한 명의 새로운 인간보다 마을 속 한 명의 새로운 인간이 더 가치 있다.

철학의 발전은 근대주의(유전자, 신을 중시)에서 탈근대주의(유전자, 신을 멸시)로 나아가고 있다. 1972년에는 미국인의 90%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지만, 최근들어서는 그 비율이 64%에 불과하며 더 떨어지고 있다. 탈근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옳은 정신인가? 이 세상에 틀린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다양할 뿐이며 우열도 없고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이 그것의 가치 평가는 자신의 관점(새로움, 자유로움)속에서 가치를 스스로 메기는 것은 정당한가? 탈근대주의 정신은 그렇다고 말한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라고 외치고 싶다. 신을 중시하지도, 멸시하지도 않는 정신에서 새로움을 찾으라 외치고 싶다. 이제는 신근대주의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부자유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무런 족쇄없는 자유로움보다, 더욱 자유로운 자유로움보다 덜 자유로운 자유로움이 더 자유롭다. 나는 신에게서 뺏어낸 두 개의 족쇄 중 하나를 신에게 다시 돌려준다. 하나의 족쇄는 신의 손에, 다른 하나의 족쇄는 내가 쥐었다. 두 가지 부자유함 속에서 한 가지 자유로움을 삶으로 나타낸다.

오직,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따라서만 행동하게끔 결정되는 것은 자유롭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것에 의해 특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결정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거나 강제되었다고 한다.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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