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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데라우스티오 2024. 3. 14. 03:36

나는 누구인가? 짐승이 아닌 인간이며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플라톤이 어느 날 토론하다가 인간에 대해서 정의하는 일이 있었는데. 플라톤은 인간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고 정의하였다. 그걸 들은 디오게네스가 털 없는 닭을 들고 와서 이게 인간이냐고 따지었는데. 플라톤은 할 말이 없었다. 그 뒤로 플라톤은 인간을 정의할 때 항상 '손톱과 발톱을 가진'이라는 말을 덧붙여 '손톱과 발톱을 가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플라톤의 일화는 여기서 끝이지만 조금 더 상상해보자면 디오게네스가 원숭이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이번에도 닭처럼 털을 뽑아 플라톤에게 이게 인간이냐고 따지지 않았을까? 플라톤은 이번 역시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역시 말을 덧붙이게 됐을 거로 생각한다. '인위적 변경이 가해지지 않은'이라는 말을 덧붙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인위적 변경이 없더라도 자연에서는 돌연변이로써 털 없는 원숭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런 원숭이들은 실제로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고 말이다. 털 없는 원숭이가 이번에도 어쩌다 디오게네스의 눈에 띄었다면 역시나 플라톤에게 따지러 갔을 것이다. 플라톤은 뭐라고 답했을까?

플라톤은 영혼에 대해서 영혼삼분설을 주장하였다. 영혼은 이성,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성은 무엇이 옳은지 아는 것이고 기개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려는 속성이고 욕망은 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마도 플라톤이 덧붙이게 될 말은 '영혼을 가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플라톤이 할 인간에 대한 정의란 '영혼을 가진 인위적 변경이 가해지지 않은 손톱과 발톱을 가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 될 것이다. 꽤 길지만, 이 답변은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옳은 것과 원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딜레마에 빠지며 결국 옳은 것을 하려고 하는 복잡함을 짐승들이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기는 어려우며 그것으로 우리 인간과 짐승들을 충분히 구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이 답변도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디오게네스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설파하던 어느 날 책상다움, 술잔다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일이 있었는데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눈에는 책상과 술잔은 보이지만 책상다움, 술잔다움은 보이지 않는다고 따지었다. 그러자 플라톤은 "지당한 이야기다. 너는 책상이나 술잔을 보는 눈은 있어도 책상다움이나 술잔다움을 분별해낼 지성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하였다. 이런 일화를 볼 때 분명 디오게네스는 내 눈에 '인위적 변경이 가해지지 않은 손톱과 발톱을 가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은 보여도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고 따지었을 것이다. 그러면 역시 플라톤은 너는 영혼을 분별해낼 지성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영혼은 무엇이며 어떻게 분별해낼 수 있을까? 플라톤은 인간이 영혼을 가지었다고 했는데 영혼은 우리 몸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몸 어딘가에 영혼이 있다면 우리의 몸의 세포들은 수명이 존재하여 죽음과 탄생의 반복으로 몸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몸의 일부인 세포가 소멸할 때 영혼의 일부 또한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뇌, 안구, 심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세포는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완전한 교체가 된다. 영혼은 그대로일까? 테세우스의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지 생각해본다면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로 귀환하였을 때 그때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하였다. 그 과정에서 배의 나무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로운 판자로 교체하여 보존하였다고 하는데 이 테세우스의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그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나무판자 10개, 100개를 교체하여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그것이 반복되어 배를 구성하는 모든 나무판자가 교체되어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일까? 답은 그렇다이다. 디미트리오스 시대에도 테세우스의 배는 테세우스의 배였기 때문이며 낡은 세포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는 생겨나는 인간 또한 개명을 하지 않는다면 10년 전 10년 후에도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뇌, 안구, 심장의 세포들은 교체되지 않고 유지되기 때문에 이 중에 영혼이 있다면 영혼은 교체되지 않기에 테세우스의 배가 전부 교체되어도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 것과 내가 여전히 나인 것과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특히 이 중에서 영혼은 뇌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안구나 심장을 이식받아 교체되어도 여전히 나일 것이기 때문이고 뇌를 타인에게 이식받는다면 몸을 뺏긴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혼은 뇌에 존재한다. 하지만 영혼이 뇌에 존재하며 뇌세포가 교체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문제는 발생한다. 왜냐하면 치매, 알츠하이머 등의 뇌 손상을 가진 인간을 그 사람의 진정한 영혼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뇌 손상으로 삶을 시작한다.

우리는 태어난 직후 자아도 없으며 사고 능력도 없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며 옳은 것을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플라톤의 영혼삼분설에 의하면 이는 이성과 기개가 없고 욕망만 있으므로 짐승에 가까운 것이고 영혼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탄생은 인간보다 짐승에 가깝다. 자아는 성장 과정 어딘가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두 번 태어나며 두 번 태어난 후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자아가 언제부터 생겨나는지를 아는 것은 무지개의 적색의 끝과 주황색의 시작이 어디부터인지 고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것을 고를 방법은 없다. 이를 더미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쌀 한 가마니를 바닥에 쏟으면 쌀 한 더미가 바닥에 존재한다. 거기서 쌀 한 알을 빼도 여전히 쌀더미임은 변함이 없는데 그것을 반복하면 쌀 한 알만이 남게 되어 더 이상 쌀더미가 아니다. 언제부터 쌀더미가 아니게 되었을까? 주먹 한 줌이라고 답하여도 그게 쌀 100알이라면 99알은 쌀더미가 아닌가? 98알은? 이것의 경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이 더미의 역설이다.

뇌세포는 교체되지 않을지언정 뇌 안의 영혼 또는 영혼을 이루는 무언가들은 교체가 되고 있으므로 뇌세포의 교체되지 않음에서 나 자신이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우리는 무엇에서 여전히 내가 나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 드라마 스마트렉에서는 순간이동 기술이 나오는데 그 원리란 인간을 원자 단위로 분해하고 입자화하여 전송 후 재조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큰 것을 옮길 때 분해 후 이동하고 재조립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같은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스타트렉에서의 순간이동 기술 또한 그런가? 이는 더미의 역설이나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나라고 생각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순간이동 기술이 분해하고 전송하고 재조립하는 것이 아닌 새로이 창조하는 것으로 바뀐다면 어떤가? 순간이동 전 장소에서 한 인간의 모든 정보를 데이터화시킨 후 순간이동 후 장소에서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완전히 같지만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 후 순간이동 전 장소의 인간을 소멸시킨다면 여전히 나인가? 이것은 마치 우리가 롤플레잉 게임을 할 때 캐릭터가 죽은 후 마을에서 부활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죽기 전과 후에 경험치 손실은 조금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죽은 전의 아이템, 캐릭터의 능력치, 스킬 등이 전부 동일한데 어떤 사람도 마을에서 부활한 후의 캐릭터가 죽기 직전 캐릭터와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기 전과 부활 후 캐릭터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 없이 동일하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관찰자 입장에서 게임 캐릭터를 보기에 동일한 캐릭터로 인식함과 마찬가지로 관찰자인 타인들은 순간이동 전후 그러니까 실제로는 원래의 나는 소멸하고 새로이 창조된 나를 구별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이 창조된 나 또한 그것을 구분할 수 없다. 그저 순간이동했다고 인식할 것이다. 나는 클론이며 나는 그저 나인 척을 할 뿐인 데이터 덩어리라고 생각 할 수 있을까?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테세우스의 배 역설을 한 번 더 꼬았다고 한다. 낡은 판자를 새로운 판자로 갈아 끼운 배가 존재하는데 갈아 끼우고 난 후 남은 낡은 판자를 전부 모아서 테세우스의 배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판자지만 원래의 배, 원래의 판자지만 새로운 배 이렇게 두 척의 배가 생겼다고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즉 토머스 홉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순간이동 기술에 대입하자면 순간이동 기술에 오류가 생기는 사고로 인하여 순간이동 후 순간이동 전 원래의 내가 소멸하지 않고 동시간에 나 자신이 두 명이 존재하게 될 때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묻는 것이다. 어느 쪽도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할 것이며 타인들은 구분할 수 없고 그 자신들도 또한 진짜를 구분할 방법은 없다. 내가 나라고 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만약, 순간이동 기술이 사실 조금 구시대적이었다고 상상해본다면 어떨까? 순간이동 후 새로이 그 사람을 창조하고 순간이동 전 그 사람을 소멸하는 방식은 길로틴에 의한 처형 후 시체를 소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보는 철저히 숨겨진다면 어떨까? 이 사람은 이전에도 순간이동 기술을 이용한 적이 있으며 그 기억이란 순간이동 장치에 들어간 후 순간이동되어 다른 장치에서 나왔다는 기억이다. 그 기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저 순간이동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이동은 되지 않았고 그 이전 자신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공포와 고통 속에서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고 시체는 소각되었다. 그리고 순간이동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이번에도 순간이동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나인가? 구시대적인 순간이동 기술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죽음을 경험했다. 여전히 나이면서도 나라고는 하기 힘들 것이다. 그 이유는 나라는 근거를 내가 시공간의 연속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달라지고 동일한 점이 단 하나도 없어도 시간적, 공간적 연결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이라는 찰나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살아가는 한, 단 한 번의 끊어짐 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르며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다. 나는 10년 전의 나 자신과 다르며 동시에 10년 전의 나 자신과 똑같다. 내 삶은 안정적인 혼돈이며, 혼돈과 반복 둘 모두다.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

나는 누구인가?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며 지금이다. 동시에 나 자신이 두 명 이상 존재하게 될 때 지금(찰나)을 사는 인간이 두 명이 되므로 이것은 나 자신이 분화된 것이다. 이 지금(찰나)들은 더 이상 완전히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그 차이는 더욱이 벌어져 이윽고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이처럼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것은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타인과 다른 경험을 하며 나는 타인과 다르게 된다.

외부에서 내부로 어떤 경험이 들어올 때 그것을 어떻게 인지하고 해석하는지 또한 나의 영혼을 결정하는 요소이다. 이 내부의 인지와 해석 또한 살아오면서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에 따라 형태가 변할 수 있다. 즉 나는 내부의 무언가라기보다 외부의 경험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라는 범위는 내부에 국한되지 않고 외부까지 범위가 확장되는데 나의 신체, 뇌만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범위는 내 몸을 벗어난 나의 옷, 나의 물건, 나의 방에도 나의 정체성, 나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들에게 우리는 그것을 나 자신과 동일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이나 글을 평가받을 때 타인이 그 그림이나 글에 내리는 평가를 그 물건에 대한 평가가 아닌 나에 대한 평가로 느끼기 때문이다. 나와 나로부터 나온 물건들은 분리될 수 없고 나의 영혼의 일부가 된다.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런 상상을 해보길 바란다. 지금 갑자기 조선 시대 어딘가로 이동되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언어는 통한다고 가정한다. 어떤 조선인이 다가와서 묻는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 어디 사는 누구입니다라고 말하여도 그 어디라는 것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어떤 일을 하는 누구입니다라고 해도 그 어떤 일이라는 것도 이제 없다. 좋아하는 것을 말하여도 이제 없고 나의 방도 없으며 나의 물건도 없고 나의 재산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나는 누구인가?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신체와 뇌인가? 그것만으론 나를 설명할 수가 없다. 신체와 뇌만이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영향받고 연결된 모든 것이 나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이 사라지면 나 또한 사라지며 영혼의 소실인 것이다. 나는 연결 없이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연결이다.

국가, 가족, 친구가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말하기 어렵다.
물건, 재산, 집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말하기 어렵다.
직업, 옷과 패션, 머리와 헤어스타일 등 또한 나를 말해준다.
그것들 모두 나의 영혼의 일부이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와의 연결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연결 또한 내 영혼의 일부이며
나의 방이나 나의 물건 또한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듯 물질과의 연결 또한 나의 영혼의 일부이다.
그리고 또한 글과 그림이 나와 분리될 수 없듯이 비물질과의 연결들 또한 나의 영혼의 일부이다.
사람과 물질, 비물질과의 모든 연결점이 나 자신이자 나의 영혼이 되는 것이다.

비물질과의 연결이란 철학, 논리, 사상, 아이디어 등 비물질 중에서도 나에게 더욱 끌리는 것이 있으며 나는 그것들과 연결되며 그것들은 나를 표현함으로써 나의 일부가 된다.

또한 물질과의 연결이란 가이아와의 연결을 뜻하는데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자 만물의 여신 그리고 모든 신들의 근원적 어머니이기도 하며 태초의 신이자 창조 어머니 신이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지구의 대지에 국한되지 않고 우주 전체를 상징한다 할 수 있다. 가이아가 우주 전체라 함은 내가 누구인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모든 공간과 시간과 나의 연결을 규정하는 것 또한 나의 영혼의 된다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어머니로부터 가아이로부터 연결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타락한다. 그 의미는 이 우주 공간은 너무도 크지만, 자신 차지하는 크기는 너무도 작다는 것이며 이 우주의 시간은 너무도 길지만, 자신이 차지하는 시간은 너무도 작다는 것이다. 자신과 가이아로 부터 연결점을 찾지 못한다면 영혼은 나와 연결되지 못하고 연결점을 찾아헤메며 타락한 상태로 우주의 빈공간을 떠돌게 된다. 이는 비극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쓰러 넘어져도 듣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피터 퍼디낸드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

내가 말을 하여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존재하여도 나의 존재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외부와의 연결 없이는 나를 설명할 수도 없을뿐더러 나는 실존할 수도 없다.
나는 연결이다.

나는 영혼이며 나는 지금이며 나는 연결이다. 지금을 살아도 연결이 있어도, 영혼이 없다면 너는 너가 아니다.
영혼이란 이성과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성이란 무엇이 나에게 옳은지, 옳지 않은 지 구별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며, 기개란 그 아는 것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용기이다. 즉, 아무리 지금을 살고 연결이 있어도 이성과 기개 없이는 영혼이란 있을 수 없으며 영혼이 없는 인간이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너는 짐승인가? 짐승은 욕망만을 갖고 지금을 산다. 너는 욕망인가? 너는 누구인가? 삶은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 물어본다. 우리는 행위로써 그것을 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