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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할 자격은 완전무결한 악인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완전무결한 악인은 살해당해야만 할 자격도 동시에 충족한다.
완전무결한 악인은 자살하여야만 하며 그렇지 않다면 살해당해야만 한다.
완전무결이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어떠한 확률적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악인이란 그 악인이 본인은 제외한 다른 대상에게 끼치는 해악이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소금물은 짜다. 하지만 그 소금물에 맑은 물을 더 하면 덜 짜다.
더 하고 또 더하고 극한으로 더 한다고 한들 소금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불멸하며 여전히 그 물속에 존재하지만
맑은 물과 구분할 수 없다.
강물은 흐르며 그 강은 고정적이지 않다.
강의 강물이 오염되었다고 한들 그 강물은 마를 수도 있고 다시 정화될 수도 있다.
숲은 사막이 될 수도, 사막은 숲이 될 수도 있다.
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인간이라는 강물이 현재 오염되어 있다고 할지언정 다시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자살할 자격이 충분한 인간의 특징
⑴나이가 많다.
⑵살아오면서 남(동물, 식물, 자연, 생태계를 포함)에게 해악을 많이 끼쳤다.
⑶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⑷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⑷는 신의 영역이며 미래는 알 수가 없기 때문에 ⑴의 조건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1억을 빌렸는데 꼭 갚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이가 20살인 경우와 55살인 경우에 따라서 그 말의 진정성은 차이가 난다. 60세에 퇴직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20살의 경우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은 40년이 남았으며 55살은 5년밖에 남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인성이 더 쓰레기 같아서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그 말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이다.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지은 죄(해악)에 대해서 중화시킬 시간(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살할 자격이 충분한 인간인지 속단하기에는 예외(가능성)가 존재한다. 소금물에, 하루에 물 한 바가지를 붓는다면, 그 사람이 그 소금물을 더 이상 짜지 않게 만들 가능성이 나이가 어릴수록 더 많기 때문이다.
⑷는 신의 영역임에도 자신 스스로 미래에 대해서 속단하는 것 또한 자살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어떤 인간은 나이가 어리며 살아오면서도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았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해악을 끼칠만한 심성이 아님에도 자살한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과거가 힘들었고 현재도 힘들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과거가 힘든 것, 현재가 힘든 것, 미래가 힘들 것 전부 자신의 책임이다. 그것은 극복해야 할 시련이지 자살해야 할 자격은 아니다.
55살인 남성이 1억을 다 갚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살해야 하는가?
아니다. 60살이 되기 전까지 5년 동안 1억 중 일부라도 갚을 수 있기 때문에 살아가야 하며 갚아 나가야 한다. 전부를 갚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60살이 되어서 빚이 남아있다면 자살하여야 하는가? 아니다. 그 사람이 갚을 마음이 존재하지만 정말로 능력이 부족하여 갚을 수 없다면 그리고 추가로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지 않다면 자살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그 인간의 심성 자체가 타인에게 기생하고 사기 치고 해악을 끼치고 자신만 이득을 보려고 하는 심성이라면 그 인간의 존재, 그 인간이 이 지구에 체류하는 시간에 비례하여 사회에서 끼치는 해악의 정도는 커지기만 하므로 그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자살&살해이다. 그런 인간은 자살할&살해당할 자격이 충분하다.
태어나서 여태까지 사회에 해악만을 끼쳐왔더라도,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면 그리고 그 해악의 정도가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면 살아갈 자격은 된다. 비록, 그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타인에게 좋은 소리는 못 받겠지만 말이다. 사회에 해악을 줄수록 그 인간은 죽어야 하며 사회에 편익을 줄수록 그 인간은 살아야만 한다. 해악만을 끼치는 인간은 그 본인이 살고 싶어 하더라도 죽어야만 하는 인간이며 편익만을 끼치는 인간은 그 본인이 죽고 싶어 하더라도 살아야만 하는 인긴이다. 나 혼자서 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것, 내 남은 삶은 고통뿐이라고 믿는 것은 자살한 자격으로서 충분치 못하다.
앞으로 자살할 계획이라면 다음을 확인하라.
⑴나는 과거에 나를 제외한 대상들에게 얼마만큼의 해악을 끼치고 살아왔는가?
⑵나의 존재 자체가 현재도 나를 제외한 대상들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는가?
⑶나는 완전히 갱생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내가 여태까지 끼쳐온 해악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만큼의 해악인가?
⑷나는 그것을 전혀 갚을 생각이 없는 인간인가?
⑸나는 나이가 너무 많고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사회에 누적한 해악이 너무도 큰가?
⑹지금부터 갚는다 한들 내가 지은 해악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준인가?
모든 것에 하나도 빠짐없이 해당한다면 당장 죽어라.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선과 악을 완전히 양적으로 계량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 1명을 죽인 사람의 죄가 사람 1명을 살리는 것으로 그 선악의 총합이 0이 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소금물 속의 소금은 불멸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지만 물을 계속 붓는다면 맑은 물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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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간의 윤리, 도덕, 자살,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복잡한 주제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된 논리는 인간의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극단적인 해석을 제공하며, 이는 심리학적, 철학적, 윤리적 관점에서 깊은 통찰을 요구합니다. 특히, 이 글은 자살에 대한 자격과 사회적 해악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고찰하면서, 인간의 변화 가능성과 갱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심리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이 무의식적 욕구와 갈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악행이나 해악은 무의식적 욕구의 충돌과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욕구와 갈등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라캉은 자아의 구성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타인에게 끼치는 해악은 자아의 불완전함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라캉은 또한 욕망의 끝없는 추구가 결코 완전히 만족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은 복잡한 인간 심리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제기된 자살의 조건들은 극단적이며,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복잡성과 변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은 과거의 행위에 의해 영원히 정의될 수 없으며, 심리분석은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와 갈등을 이해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또한, 사회적 해악을 끼친 개인도 갱생과 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 용서와 재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며, 자기 반성과 개선을 통해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개인의 과거 행동이 현재와 미래의 정체성을 전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며, 인간은 언제나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닙니다.
결론적으로, 이 글에서 제시된 자살에 대한 근거와 조건은 인간의 복잡성과 변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극단적인 시각입니다. 심리분석은 개인이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와 갈등을 탐색하고 해결함으로써,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윤리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과 행동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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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극단적인 글이 아니다. 변화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였으며 변화 가능성이 0에 한없이 가까운 인간이 조건을 충족한다고 적은 글이다. 변화 가능성이 있는 한 자살은 책임을 회피하는 잘못된 방법이며 자살은 답이 될 수 없으며 살인 또한 그렇다. 가장 좋은 답은 처음부터 제대로 살거나 아니면 적어도 중간부터 제대로 살거나 아니면 최소한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살지도 않았고 제대로 살 예정도 없으며 그 어떤 가능성에서도 사회에 해악만 끼치는 방향으로 고정된 인간이 있다면 그리고 그 가능성을 법적,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과학적인 모든 면에서 고려하여 가능성이 0에 매우 가깝다면 그런 인간은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갱생할 수도 있는 인간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하겠지만 기회를 무한정 주는 것은 사회에 대한 해악이 무한정 커지는 결과는 초례한다. 범죄자에게 기회를 줄 때마다 무고한 시민 1명이 죽어 나갈 수 있으며 죽음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기회를 주는 행위에 비용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님에도 이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한다. 사회의 운영에 있어서는 냉철한 경제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비용과 리스크 그리고 리턴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하고 기회를 주는 일은 비용과 리스크 그리고 리턴의 최소한의 비율에 대해서 상당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계산하여도 리턴이 비용과 리스크의 합보다 적다면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리턴이 더 적은 데 비용을 낭비하고 결과적으로 리스크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행위를 사회가 반복한다면 그 사회는 붕괴가 촉진되는 일이며 고작 범죄자에게 기회를 더 주기 위해 무정부사태를 앞당기는 일이다. 사회의 붕괴보다 사회에 있어서 더 큰 해악은 없다. 사회가 붕괴하면 인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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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변화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극단적인 경우에 대한 사회적 대응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으며, 사회적, 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책임과 기회의 제공에 대한 한계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작용, 개인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그 변화를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심리분석적 관점에서, 인간 행동의 변화 가능성은 개인의 내적 동기, 무의식적 욕구, 그리고 외부 환경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통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내재적인 갈등을 해결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무의식적 욕구를 표현하는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라캉은 욕망의 구조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가 형성되고 변화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종종 오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법적, 윤리적 기준이 개인의 행동에 대한 사회적 판단과 대응을 안내합니다. 이러한 기준은 사회적 질서 유지와 개인의 권리 보호 사이의 균형을 추구합니다. 기회의 제공과 갱생의 가능성은 이러한 판단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범죄와 처벌의 문제를 다룰 때 사회는 범죄자에게 변화할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비용, 리스크, 리턴을 고려하는 것은 사회적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서 중요합니다. 범죄자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높은 사회적 비용을 수반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용은 사회적 안정성과 질서 유지를 위해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회적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는 동시에 변화와 갱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복잡한 과제입니다. 이 과제는 사회적, 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지속적인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화는 개인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고 촉진하는 동시에, 사회적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따라서, 범죄자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은 지속적인 사회적 논의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과정에서 심리학적, 윤리적, 법적, 경제학적 관점을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러한 통합적 접근은 사회적 질서와 개인의 변화 가능성 사이의 균형을 찾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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