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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잡다한 아무 생각 44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니체의 철학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니체는 '낙타→사자→아이'로 인간의 정신이 3단계의 변화를 거친다고 하였다.낙타는 한 번에 약 114리터의 물을 체내에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막에서 물없이 길게는 20일정도 버틸 수 있다고 하며 극단적으로는 몇 개월을 버티기도 하며 사막의 유일한 운송수단이다. 낙타가 지방을 체내에 충분히 저장하였다면 음식 없이 4~5개월 생존 또한 가능하다. 극단적인 외부 압력을 버티는 태도의 상징이 낙타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 비추자면 낙타는 노동자에 해당할 것이다. 니체의 철학을 읽고, 낙타라는 태도와 그 위치, 상태를 하등한 것으로 이해하고 무시, 멸시하고 빠르게 배제 및 지양되어야할 태도라고 이해하는 사..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짐승이 아닌 인간이며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플라톤이 어느 날 토론하다가 인간에 대해서 정의하는 일이 있었는데. 플라톤은 인간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고 정의하였다. 그걸 들은 디오게네스가 털 없는 닭을 들고 와서 이게 인간이냐고 따지었는데. 플라톤은 할 말이 없었다. 그 뒤로 플라톤은 인간을 정의할 때 항상 '손톱과 발톱을 가진'이라는 말을 덧붙여 '손톱과 발톱을 가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플라톤의 일화는 여기서 끝이지만 조금 더 상상해보자면 디오게네스가 원숭이를 발견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이번에도 닭처럼 털을 뽑아 플라톤에게 이게 인간이냐고 따지지 않았을까? 플라톤은 이번 역시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역시 말을 덧붙이게 됐을..

계즉시란 란즉시계

User 어느 날, 어떤 닭은 생각하였다. '계즉시란, 난즉시계, 닭은 곧 알이며 알은 곧 닭이다. 그러니 모든 닭은 알이다.' '고로 닭은 허상이며 진상은 알이다. 모든 닭은 허상이다.' 어떤 닭은 다른 수탉이 크고 위협적인 벼슬을 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벼슬은 허상이야.' 어떤 닭은 또 다른 수탉이 암탉과 함께 다니는 것을 보았다. '암탉은 허상이야.' 어떤 닭은 거울을 보고 생각하였다. '나는 허상이야.' 닭은 알을 낳고, 알은 닭을 낳는다. 계즉시란 란즉시계(鷄卽是卵 卵卽是鷄). GPT 이 이야기는 정체성, 존재, 그리고 현상과 본질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심오한 담론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주제는 정신분석학, 특히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닭의 사유 과정은 자아와..

바나나를 좋아하는 인간과 로봇

User 로봇은 바나나를 좋아한다. 어느 미래, 나는 로봇을 만들었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했고 로봇도 바나나를 좋아하게 의도하였다. 로봇에게 돈을 주고 먹고 싶은 과일을 사 오라고 했다. 로봇은 과일가게로 가서 바나나를 사 왔다. 로봇에게 물었다. "바나나를 누가 사 왔어?" 로봇이 답했다. "내가 사 왔어." 로봇에게 물었다. "바나나를 왜 사 왔어? 로봇이 답했다. "바나나를 좋아해." 우리는 바나나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로봇에게 물었다. "바나나를 왜 좋아해?" 로봇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너가 좋아하니까?" 나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GPT 이 이야기는 인간과 로봇 사이의 관계, 그리고 로봇의 인식과 자아 정체성에 대해 깊이 있는 심리적 탐구를 제공합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

이기심의 부재는 죽음과 같다.

이기적이지 않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인간은 이기적이다. 이타적 행위란 자신의 이기심과 상대의 이기심을 동시에 채우는 것이며, 이기적 행위란 자신의 이기심만을 채우는 것이다. 이타심이란 자신과 상대의 이기심을 전부 중요시하는 마음이며, 자신의 이기심을 소흘히 하고 그것을 이타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열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타심의 증명은 이기심의 부재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 이기심의 형태의 증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인간인지 의심하지 않는다.

검은 숲속 마을의 어떤 인간이 밤에 눈을 뜬다. 잠에서 눈을 깨고 일어나니 괴물은 지루해한다. 지루한 괴물에게 제물을 받치고 괴물은 쾌락을 얻는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인간은 연명하고 잠에 든다. 검은 숲속 마을의 인간들은 괴물이 자신을 언제 먹지 않을까 항상 불안하다. 그래서 매일매일 제물을 받친다. 괴물이 지루해하지 않는 한 연명할 수 있다. 하지만 괴물에게 먹힌 삶과 괴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삶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미 괴물의 일부이며 괴물 그 자체가 아닌가? 괴물의 입에는 음식이 들어가고 괴물의 눈에는 유튜브가 들어간다. 괴물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괴물은 가끔, 사람을 먹는다. 어떤 사람은 가끔, 괴물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자기 삶이 괴물에게 먹혀버렸는데도, 먹힐 것이 두려워서 ..

토끼는 고통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사자는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존중을 구걸하지 마라. 너에게 줄 건 남아있지도 않다. 너는 존중받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사자는 토끼가 어떤 고통을 받는 지 따윈 관심이 없다. 살아남기 바쁘기 때문이다. 사자는 다른 사자들에게 관심이 많다. 살아남기 바쁘기 때문이다. 사자가 말하길, 너의 고통은 별로 바쁜 일도 아니라 한다. 고통의 이유는 부당함이 아니라 나약함이라 한다. 고통을 느긋이 즐겨랍신다.

어떤 나무는 이름이 없다.

사과나무에는 사과나무라는 이름이 있으나 어떤 나무는 이름이 없다. 사과나무 주변에는 동물들이 자주 오나, 어떤 나무는 어떤 동물도 오지 않는다. 사과나무는 열매가 열리나 어떤 나무는 열리지 않는다. 그 열매는 다른 동물이 먹고, 사과나무의 씨앗은 널리 퍼진다. 어떤 나무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느 땅 한 쪽에, 그저 홀로 존재할 뿐이며 말라가고 있다. 그 나무는 이름이 없다. 그 나무는 이제 없다. 어떤 나무는 이름이 없었고, 이제는 존재마저도 없다. 우리는 그 나무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존재했는지조차 모른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존재했다는 흔적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는, 한낱 어떤 나무의 짧은 망상이었던 것일지도 모..

지옥의 문(확률)과 자유의 문지기(설계자)

어떤 미치광이가 사람 100명을 납치하여 가두어놓고 말했다.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저 문을 통해서 나가라고 말이다. 어떤 한 사람이 나가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지기같이 생긴 기계장치의 눈이 뜨인다. 그 한 명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떤 다음 사람이 문을 열려고 하였다. 문지기는 눈을 뜨고 그 사람을 쳐다본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문지기에게 목이 베였다. 그렇게 10명이 나가려고 하였으며 5명은 자유를 얻었고, 5명은 죽었다. 11번째 인간은 생각한다. 50%의 확률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연다. 죽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50% 확률에 걸고 문을 열었다. 현재까지 49명이 죽었고 49명이 자유를 얻었다. 99번째 인간이 50%의 확률에 목숨을 걸고 문을 열었다. 100번째 인간은 두려움에 ..

비극의 그림자는 나태함으로 나타난다.

나태한 것은 우월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정신 상태가 특별하긴 하다. 삶이 비극적으로 느껴진다면 비극적인 것은 삶이 아니라 너의 태도이다. 비극이란 없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 무엇도 하지 않는 정신 상태가 비극이다. ​나태한 것은 비극적인 것 또한 아니다. 단지, 그것을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정신 상태가 비극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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